<중경삼림> 속 파인애플 통조림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by 김미양
중경삼림 포스터.jpg 영화 <중경삼림> 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1995)


내가 홍콩이란 도시에 매료된 것은 영화 <중경삼림>을 통해서였다.

화려한 야경 너머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좁은 골목들. 그 어두운 길 위를 걸어 나가는 네 명의 위태로운 청춘들. 그들은 마치 홍콩이란 이름의 잡지에서 마구잡이로 찢겨 나온 종이 조각 같았다.


우리는 항상 어깨를 스치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입부에 깔리는 내레이션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청춘의 조각들을 얼기설기 덧붙여 만든 한 편의 콜라주 같은 영화다. 서로가 서로의 곁을 스쳐 지나가고 예기치 못한 순간 다시 재회하면서 강렬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 강렬한 4인 4색의 조각 중에서도 유독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청춘이 있었다. 경찰 ‘223(금성무)’. 그는 여자 친구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남자다.


중경삼림 스틸컷3.jpg 영화 <중경삼림> 스틸컷


‘223’이 여자친구 ‘메이’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은 날은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그 사실은 그에게 희망의 근거가 된다. 그는 이별이 거짓일 거라 믿으며 그녀의 연락을 기다린다. 울리지 않는 삐삐만 괜히 만지작거리게 되는 밤이 몇 번이나 지났을까. 문득 그는 결심한다. 딱 한 달만 그녀를 기다려 보기로. 5월 1일, 자신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 돌아오는 날까지.

그리고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나씩 사 모으기 시작한다.

그녀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자신 곁을 떠나버린 메이(May)를 기다리며 ‘1 MAY’라는 글자가 찍힌 통조림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나날. 그 쓸쓸한 여정은 한 달 동안 계속된다. 편의점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 선반에 놓인 통조림을 하나하나 뒤지는 그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통조림을 찾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파인애플 통조림 수집에 몰두한다. 가련한 순정 같았던 그의 행동은 어느새 미련한 집착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5월 1일이 유효기간인 파인애플 통조림이 있나요?”
“내일이 기한인 물건은 꺼내놓질 않습니다.”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폐기처분 한다는 겁니까?”
“기한 지난 거 누가 좋아하죠? 다들 신선한 걸 찾지.”
“신선? 무슨 신선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새로운 것만 탐하죠. 파인애플 통조림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기나 해요? 기르고, 수확하고, 얇게 썰어 넣고, 그런 걸 그냥 폐기처분 해요? 통조림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이나 해 봤나요?”

_영화 <중경삼림> 속 대사




나 역시 그런 지질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즈음의 내 나이 역시 스물다섯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 사랑의 이름은 준(June.) 5월(May)이 아닌 6월이었다.

지독한 짝사랑 끝에 겨우 상대의 마음을 얻어냈지만, 그 여름날의 행복은 꿈결처럼 짧았다. 연애의 달콤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잠적해 버린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이별 방식에 나는 고통스러웠다. 처음엔 그게 이별일 거라 믿지 않았다. 당연히 그가 곧 돌아오리라 믿었다. 그 후론 전화기를 손에서 떼지 않은 채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하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눈물로 눅눅해져 버린 그해 여름의 어느 밤. 연결되지 않는 번호를 집요하게 눌러대며 통화 연결음만 하염없이 듣고 있던 순간에,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몇 년 전에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허리 쪽에 종양이 있다더라, 그런데 악성은 아니라더라―는 그의 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던 그 말이 갑자기 떠올라 나를 불안하게 했다. 아니, 알 수 없는 희망을 갖게 했다.

나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하철도 버스도 다니지 않는 컴컴한 새벽이었다. 아직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 오로지 어렴풋한 기억에만 의존해 그가 살았던 동네 인근의 병원 이름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그리고 절박한 심정이 되어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이 길을 쭉 가다 보면 큰 대학병원이,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면 아마도 근처에 또 다른 병원 하나가. 그런 식으로 병원 몇 개를 모두 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름밤은 짧았고, 어둠이 걷힐 무렵에야 겨우 첫 번째 병원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뿐이었다. 무모하게 솟아났던 용기는 햇살이 드리워진 순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는 우두커니 병원 입구에 서 있었다. 들어가서 뭘 확인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속 경찰 ‘223’ 역시 밤거리를 헤맨다. 편의점을 몇 군데나 돌아다닌 끝에야 그는 서른 번째 통조림을 겨우 손에 넣는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일.

스물네 살의 밤과 스물다섯 살의 아침, 그 사이를 통과하는 새벽에 그는 어둑한 방 안에서 홀로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나씩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한 캔, 그리고 또 한 캔.


중경삼림 스틸컷2.jpg 영화 <중경삼림> 스틸컷

그는 금붕어가 헤엄치는 어항의 유리 표면에 얼굴을 갖다 대기도 하고, 강아지와 마주 앉아 눈을 맞춰보기도 한다. 하지만 금붕어도 강아지도 그와 함께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나지막이 묻는다.

“왜 지금은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거지?”

그 순간, 스크린 너머 그에게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 영화 초반의 장면을 몇 번이나 되돌려 봤는지 모르겠다.

편의점에서 통조림을 뒤지는 그의 손을 보고, 편의점 직원과 주고받는 대화를 보고, 격분해서 소리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장면 하나하나를 다시 되돌려 보고 또 되돌려 보았을 때,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대사 속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이란 글자가 흐릿해지고 빈자리에 ‘사랑’이란 단어가 채워졌을 때, 그때, 나의 마음은 더욱 절절해졌다.

스물다섯의 내가 그의 편에 서서 함께 외치고 있었다.

“사랑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기나 해요? 그런 걸 그냥 폐기처분해요?”


그렇다. 사랑.

신선하지 않아도, 내게는 사랑.

유통기한이 채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혹은 유통기한이 지나버려도,

남들은 거들떠보지 않아도 함부로 폐기처분할 수 없는,

그저 안타깝고 소중하기만 한,

그런 사랑.



모든 사랑에는 반드시 유통기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마 우리가 몰랐겠는가. 캔 안에 봉인되어 찰랑거리는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을 뿐. 딸각, 하고 열어본 캔 안에는 분명 파인애플이 보이는데. 껍질과 심지를 제거하고 반듯하게 잘라낸 과육이 아직 이렇게나 빛나는데. 당장 며칠 뒤엔 썩어버릴 이 ‘사랑’이란 이름의 통조림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해 잠시라도 더 붙들고 싶었을 뿐.


서른 개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오래전 내가 걸었던 여름밤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서대전 네거리를 가득 메운 푸르스름한 공기, 머리카락을 스치던 바람, 옷에 배인 희미한 땀 냄새, 손안에 쏙 들어오던 작은 폴더폰의 차가운 감촉, 눅눅해진 손바닥.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주점의 간판들이 일제히 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고, 간간이 취객들의 고함 소리도 들려왔지만, 그 소란한 공간 속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홍콩이라는 도시의 한 페이지에 인쇄된 그를 주욱, 찢어내 서대전 네거리 역 근처 어딘가 가로수가 빼곡히 심어진 길 위에 붙여놓을 수 있었다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새벽, 나라는 종이 조각과 그라는 종이 조각, 쓸쓸한 도시 위 나풀거리는 청춘들의 찢긴 가장자리가 콜라주처럼 맞닿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스물다섯의 우리는 조금 덜 외로울 수 있었을 텐데.

어깨를 맞댄 채로 묵묵히 통조림을 함께 비우면서, 그렇게.




화려한 불빛 뒤에 가려진 어느 골목 어둑한 집 안에는 여전히, 사랑의 유통기한에 가슴 졸이는 청춘들이 있을 것이다.


사랑의 유통기한이 만년이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통조림처럼 외면당한 우리의 마음이 안녕하길.


유통기한의 밤이 지나, 거부할 수 없는 아침 햇빛이 드리워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1 MAY 1994(중경삼림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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