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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타 Mar 04. 2022

시작이 좋아

교단일기 (2022)

 코로나19가 일파만파 퍼지며 결국 우리 1학년 아이들과는 얼렁뚱땅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다. 긴급돌봄 때문에 학교에 오던 두 명의 어린이들과 짧은 작별인사를 마치고 나니 당연히 마음이 섭섭했지만… 그래도 1년 무사히 잘 품고있다가 훨훨 날려보낸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괜찮았다. 우리 어린이들이 잔뜩 사랑받고 웃으며 씩씩하게 잘 컸으면 좋겠다.



 그리고 올 해 나는 6학년 담임을 맡았다. 학교에 있는 3년 동안 저중고의 원칙을 완벽하게 지킨 셈이다. 담백하게 반을 꾸미고 온갖 고민을 하며 첫 날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어쩜 나 아닌 다른 선생님들께서는 학급 운영도 이렇게 알차게 하시는걸까? 학급 내에서 나라도 만들고 세금도 내고 미덕도 빛내고… 따라하고 싶은 것들이 정말 수천 수만가지인데, 당장 수업 준비에 업무에 생활지도만 해도 마음이 벅찬 나는 올해도 멋진 무언가를 준비하지 못했다. 그냥 무사히, 학교폭력 없이, 많이 웃고 중학교까지 스무스하게 보내는 것이 이번 농사의 목표다.



 대신 올해는 상점제를 도입해보았다. 쿠폰을 다 채우면 뽑기를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귀여운 이벤트! 쿠폰도 직접 주문했다. 500매나 주문을 해두어서 아마 다음 학교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회를 좀 열심히 보면 좋을 것 같아 배움공책도 쓰고, 아침 두줄쓰기 하고 싶어서 사비로 공책도 주문했다. 아침 독서 습관이 잡히면 4월부터는 글을 쓰며 아침을 열어볼 생각이다.



 만반의 (?) 준비 아래 3월 2일에 처음 만난 우리 6학년들은 내 생각보다 더 애기들같았다. 분명 작년에 강당 앞에서 마피아게임을 하던 6학년들은 엠티 온 대학생들 같았는데… 얼굴도 목소리도 아직은 어린이 티가 팍팍 났다. 그래도 학교에서 제일 대장이라고 마음 속은 영글어있는 티가 제법 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 소개를 하고 나서 질문을 좀 받아보려고 포스트잇을 돌렸더니 어떤 책을 좋아하냐는 질문이 돌아와서 맘 속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세상에, 이런 문명인과 문명인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지금 초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 맞나? 둘쨋날 국어 수업시간에 비유법을 이해하는 모습엔 입이 떡 벌어졌고 셋째날인 오늘 자기소개 캔디머신을 야물딱지게 색칠해내는 모습을 보곤 거짓말 않고 기절할 뻔 했다. 저학년에 있다 함께 6학년에 온 동학년 선생님은 오늘 종이접기를 즐겁게 했다며 기뻐하셨다. 저학년에 물든 우리가 보기엔 6학년은 정말 천재만재가 따로 없는 것이다.



 3월에 방심하면 4월부터 힘들어진다고들 하시기에 어떻게 좀 웃음기를 빼고 생활해보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렇게 새학기를 잘 시작해보려 노력하는 티가 팍팍 나는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웃지 않고 3월을 보낼 수 있을까? 3일 동안 흐뭇한 마음에 잔뜩 부풀어오른 나는 마스크 뒤로도 티가 날 정도로 많이 웃어버렸다. 지나고 보니 괜히 큰일났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젠 더욱 더 꼼꼼하고 단호해져야만 한다. 차분하고 꼼꼼하지만 재미있는 면도 있는 선생님 정도가 좋겠다. 시작이 좋은만큼 앞으로의 항해도 순탄했음 좋겠다. 힘든 일이 없으리라고 아주 기대하지는 않지만 올해의 나는 왠지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시작이 좋아서 그런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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