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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타 Feb 06. 2022

선생님도 초록색 옷이잖아요

교단일기 (2021)

 오늘 점심 먹고는 놀이터에 가도 좋아요. 

 와아! 드디어 나간다! 

 

 내 한마디에 우리 어린이들의 발이 동동 떠올랐다. 우리 반 어린이들은 아주 가끔 점심을 먹고 나서 바깥놀이 시간을 갖는다. 왜 아주 가끔만 나가느냐고 하니, 한참 뛰다오면 점심시간 이후 4, 5교시를 너무 힘들어하기도 하고 그놈의 코로나가 무섭기도 해서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어린이들과 밖으로 나가야만 할 것 같았다. 쉬는 시간마다 창밖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소리 없는 시위를 하는 어린이들이 점점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밥을 후루룩 먹고 나가보니 우리 어린이들은 이미 놀이터를 휩쓸고 있었다. 날이 쌀쌀한데도 이미 겉옷을 벗어 던진 아이들과 주머니에서 딱지를 꺼내 치는 아이들,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비밀 얘기를 하는 아이들……. 여기저기 흩어져서 놀고 있다가도 내가 등장하면 놀이터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모든 게임과 술래의 결정권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놀이터의 중심에 서면 우리 어린이들은 하던 일을 얼른 정리하고 나를 에워싼다. 선생님, 우리 오늘 얼음땡해요? 기차놀이 하면 안 돼요? 술래잡기해요? 무궁화 하면 안 돼요? 수많은 요청이 빗발치지만 모두 들어줄 수는 없다. 짧은 시간 동안 놀고 들어가야하니 가성비가 좋은 게임을 하기로했다. 


 오늘은 색깔 술래잡기할 거예요. 분홍색 옷 입은 친구들 모두 나오세요. 


 도망갈 시간 5초 줍니다. 5, 4, 3, 2, 1! 분홍색 출발! 쪼끄만 분홍 옷의 어린이들이 저마다 친구들을 잡으러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역배우들이 달릴 때마다 웃어서 촬영이 힘들었다던 모 감독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 어린이들도 웃음을 참지를 못한다. 달리니까 웃음이 나서 웃고, 잡히면 잡히는 대로 웃겨서 웃고, 술래를 놀리느라 웃고. 마스크를 끼고 달리느라 숨이 차는데도 배실배실 웃어대는 모습이 웃겨서 나도 덩달아 웃었다. 그렇게 분홍색 옷 친구들이 다 잡았으니 검은색 옷도 술래, 흰색 옷도 술래를 한 번씩 하고 나니 4교시 수업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손 씻고 다시 공부하러 가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한 게임만 더 하자. 오늘 술래 못한 친구들은 다음 놀이 때 꼭 술래 해요. 그리고 초록색 옷 친구들, 앞으로 나오세요. 


 나뭇잎 색깔, 키위 색깔, 라임 색깔… 온갖 색깔의 초록색 옷 어린이들은 5초를 세자마자 스프링 튕겨 나가듯 달려갔다. 동시에 꺄아, 꺄아, 여기저기서 잡히기 싫어 삐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요 선생님! 벤치를 지키며 멀거니 아이들을 바라보던 내 옷을 당기며 말했다.


 선생님도 오늘 초록색 옷이잖아요!


 민이가 작은 손으로 붙잡고 있는 건 내 소나무 색 가디건이었다.


 초록색 옷이니까 같이 게임 해야 해요!


 그래? …


 그러고 보니

 그렇네!


 민아. 미안하다. 그럼 너부터 잡아야겠다! 내 옆에 섰던 민이를 아주 치사하게 잡고서 난 당장 전속력으로 달렸다. 우리 어린이들은 내가 게임에 뜬금없이 참여했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속았다는 배신감에 깔깔 웃으며 우는소리를 하기는 했다. 선생님도 초록색 옷이었어! 속았어! 소리치며 도망 다니는 녀석들을 잡느라 오랜만에 허파가 터지도록 달렸고 웃었다. 우리 초록색 옷 팀에 누가 되지 않으려 아주 열심히 달렸다. 오늘은 어째 미끄러운 슬리퍼를 신고 달려도 발목이 아프지 않았다. 


 ‘초록색 옷’. 우리 민이와 어린이들이 만들어주고 흔쾌히 자리까지 내어준 나의 부캐. 앞으로 남은 학기동안 자주자주 꺼내어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슴슴하니 기억에 남지 않는 선생님이 되고 싶지만 놀이터를 맘껏 휘저으며 웃었던 이 시간은 조금이라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아주아주 희미하게! 함께 있으면 재미있었던 ‘초록색 옷’ 정도로 남아있기를. 오늘도 자그마한 1학년 꼬마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염치없이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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