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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아 Nov 27. 2020

1.몇 개국, 몇 개의 도시를 가봤는지는 모르겠지만요.

1. 몇 개국몇 개의 도시를 가봤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여행 많이 다니시나 봐요. 몇 개국 돌고 계신 거예요?” 

내가 긴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민석은 넌지시 물었다.      


“여행을 좋아해서 자주 갔던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세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오. 저도 여행 진짜 좋아하는데. 그럼 아시아 쪽은 다 도신 거예요?”      


민석이 포크로 감자를 찍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 심상치 않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감대를 찾는 척 은근한 대결을 시작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어디까지 가봤니’ 배틀 게임으로 초대될지도 모른다. 나는 예의 바른 미소로 적당히 대답했다.     


“아, 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다 가본 건 아니구요. 제가 가고 싶었던 곳들 정도 간 것 같아요. 가까우니까.”      


민석은 예상했던 답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음으로 준비된 질문을 매끄럽게 퍼부었다.      


“그러시구나. 맞아요. 아시아는 아무래도 가까우니까. 그럼 유럽 쪽도 다 도시고요? 어디 어디 가셨어요? 북유럽 쪽도 다 갔다 오신 거예요? 배낭여행 중이면 남미 쪽도 다 돌았겠다.”      


어쩐지 1차 라운드가 시작된 느낌이다. 내 대답 중 어떤 부분이 그의 <도전> 버튼을 누른 것일까. 여행을 너무 많이 다닌 것처럼 보였나? 몇 개국을 갔는지 세 보지 않았다는 말이 셀 수 없이 가봤다고 들린 걸까? 이게 그럴 오해가 있는 말인가? 적당한 숫자를 골라 말했어야 하나? 나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대화를 되감아보았지만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느껴졌다. 민석은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가 말을 할수록 이 대화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이 점점 명확해졌다. 여행을 깨나 다닌 것 같은 저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은 국가를 돌아다녔다는 안도감. 보통의 사람들이 못해 본 경험을 자랑할 수 있다는 뿌듯함. 뭐,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재빨리 그가 원하는 걸 쥐어주고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민석이 여행한 곳들 중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내, ‘부러움’을 살짝 섞어 아직 남미는 못 가봤다고 말했다. 그는 신나서 눈썹을 들썩이며 남미가 얼마나 환상적인 곳인지, 에콰도르에서 했던 스노클링이 어찌나 재밌었는지 따위의 이야기를 두루마지 휴지마냥 줄줄줄 풀어댔다. 민석은 그렇게 한참 동안 젊을 때 남미를 가야 한다고도 떠들었다. 내가 혹여 남미를 가지 않기라도 할까 걱정되었는지, 남은 여행 기간에 꼭 가보라는 신신당부로 이야기를 맺었다. 


모처럼 마신 맥주가 시원했고, 나른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해서 한껏 낭만적인 이야기를 모국어로 떠들고 싶었을 뿐인데. 거 참.     


나는 몇 개의 국가를 돌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런 생각으로 여행을 해도, 주변에서 자꾸 물어보면 나도 어느새 그들의 경주에 끼어들어 함께 숫자를 세고 있었다. 몇 개인지 안 세어봤다고 했지만 그 질문을 한 네 번쯤 들었을 때 사실 한 번 세어봤다. 아무도 없는 언덕배기에 앉아 손가락을 접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문득, 하루 정도 건너갔다 온 나라도 ‘몇 개국’ 안에 포함시켜 세어야 하나에서 멈칫했다. 왠지 그 정도의 일정은 ‘몇 개국’에 포함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포함시키면 왠지 다녀온 국가의 숫자를 늘리려는 느낌이라 싫고, 빼고 세려니 가기는 갔던 것이니 고민되었다. 도시의 개수를 셈하려고 보니 한층 더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뜨끔했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숫자를 신경 쓰고 있으니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셈을 포기하고 깔끔히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몇 개의 국가를 다녀왔고, 몇 개의 도시를 여행했는지 스스로 별로 궁금하지 않잖아? 그러므로 이건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야. 여행에서조차, 나마저 다른 사람들의 기준을 들이대지 말자. 됐다. 집어치우자.      


사람들은 처음 보는 직장인에게 ‘얼마 벌고 계세요? 앞으로 얼마 더 버는 게 목표이신가요?’라고 잘 묻지 않지만 장기 여행자에게 ‘몇 개국 돌고 계세요? 몇 개국이 목표예요?’ 라고는 거리낌 없이 묻곤 한다. 내가 느끼기에는 두 질문이 별 다를 바 없이 무례했다. 이미 타인의 목표를 본인들이 설정해놓고 물어보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내 여행의 목표를 ‘몇 개국 돌기’로 단정 지어놓고 묻는 사람들의 태도가 나는 불쾌했던 것이다.      


‘몇 개국 여행’은 잘못된 목표가 아니다. 그 또한 하나의 꿈이다. 그러나 세계를 여행하는 모든 사람의 목표를 세계일주로 일축하고 묻는 태도. 그 태도가 잘못이 아닐까.      


이제는 오기가 생겼다. ‘몇 개국, 몇 도시’를 묻는 사람들에게 정성스럽게 답한다.      


“저는 몇 개국 돌기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여행 그 자체를 좋아해서, 지금껏 그래 왔듯 천천히 평생 동안, 마음이 끌리는 곳에 가보고 싶어요. 그때마다 제가 좋다고 느끼는 곳에서,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고 오는 게 목표예요. 

대신, 어떤 여행 중인지 물어봐주시면 신나게 이야기할 것 같아요. 저는 요즘 여행하면서 마트 탐험이 재미있어요. 나라마다 마트에 가면 현지인들의 식습관이나 장보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롤로그를 거창하게 적은 것 같네요.. 혼잣말하듯 쓰려합니다. 가볍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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