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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wny Taewon Kim Aug 29. 2021

아날로그의 역습

리뷰: 디지털 제국 한 귀퉁이에 살아남은 아날로그 반군

전 아이디어를 정리할 때 종이를 선호합니다.


연필과 지우개, 자, 색연필과 색색의 포스트잇만 있으면 생각이 빠르게 정리가 됩니다. 물론, 모바일폰이나 PC용 도구도 자주 사용합니다. 마인드맵이나 cardflow류의 생각카드나 workflowy같은 정리 앱도 잘 맞습니다. 하지만 초기에 아이디어를 드래프팅할때는 종이가 절대적으로 좋습니다.

저는 단지 종이와 펜 작업이 재미나고(playful), 물리적인 움직임이 창의성을 자극한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최근들어 한가지 더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날은 좋은 생각의 씨앗이 뭉게뭉게 자라올라 빨리 잡아두고 싶었습니다. 마침 종이 도구들은 멀리 있었고,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이 바로 곁에 있었지요. 이태껏 애플 펜슬로 낙서 말고는 생산성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던 차에 잘됐다 아이패드에서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지요.


자 앱을 고르는게 우선 과제입니다. 펜용 아이패드 앱은 다섯 종류 이상입니다. 이중 제일 손이 많이가고 막 쓰는건 굿노트인데 이 날은 다른 앱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A는 미술적 표현이 강하고, B는 PC랑 연계성이 좋고 각자 장단점이 뚜렷합니다. 앱을 하나씩 켜서 박스를 그리고 글씨를 써봅니다. 일견 훌륭해 보이는 앱이 도구 전환에 잔동작이 많아 나오거나, 어떤 앱은 지우개가 불편해서 자꾸 들락 달락 거리게 됩니다. 이게 더 나은가?


이 과정에서 시간은 거의 반시간이 지났고, 새싹 단계의 아이디어는 물과 볕을 못받아 시들해져버렸습니다. 뻗어나오는 생각가지를 키워서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만일 종이에 그렸다면 열정의 햇빛과 창의력의 물을 만나 꽤 보기좋게 자랐겠지요.


David Sax, 2016

(원제) The revenge of analog : real things and why they matter


이 책을 읽다 몇 주전 제 일화가 떠오르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날로그는 정서와 쿨한 느낌도 좋지만, 제약이 장점이구나.


실제로 구글의 디자인 관행은, 손스케치를 우선하고 아이디어화 전단계에선 디지털 도구를 쓰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할 수 있는 디지털 도구의 그 무한한 옵션이 오히려 아이디어를 죽이는 방해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책은 제목대로 아날로그 제품과 도구의 역습을 다룹니다.

LP판, 종이, 필름 카메라, 보드게임, 책과 잡지같은 인쇄물, 서점 같은 오프라인 매장, 제조업, 학교 등입니다. 각각이  익숙한 재료라 흥미롭습니다. 아날로그의 특성 상 우리 일상과 밀접합니다. 하지만 디지털에 패퇴당한 후 역습하는 전황은 은밀하거나 로컬해 흥미로운 사례가 많습니다.


LP판이 재유행하는 정도는 알았지만, 연간 성장률 20%라는 엄청난 속도로 시장을 키워가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백년은 된 줄 알았던 몰스킨이 PDA가 처음 생산하던 즈음 나온 아날로그 산업의 특공대란 점은 이번에 알았습니다. 관에 들어갔다 생각한 잡지나 RoI가 월등히 높다는 점은 감탄이 나옵니다.


책을 바탕으로 제 나름대로 정리해본 아날로그의 강점입니다.  

디지털이 편리의 아바타라면, 아날로그는 경험의 집사다.

종이책이 좋은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손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 종이 매거진의 최대 장점은 마지막 커버를 쾅 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 서점은 구매의 장소고, 오프라인 서점은 외출의 장소다. 임의적 발견이란 보물을 숨긴.

오프라인 상점의 공간 제약은 온라인 상점의 압도적 SKU에 밀렸지만, 제약이란 잿더미에서 살아남아 큐레이션이라는 단단한 몸으로 되돌아왔다.

아날로그의 특성은 마찰이고, 마찰은 툭툭 튀는 임의성을 배태한다.

교육은 관계고 관계는 아날로그다.

사회적 관계와 물리적 상호작용은 학교의 숨은 커리큘럼이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에 교육은 질식되어버렸다.


Inuit Points ★★★★★

번역은 실력없음과 무심함을 지나 황당합니다. 나름 유명한 Rosa park을 끝내 리사 박이라고 해서 오타가 아님을 증명했고, 식료품 체인인 Albertsons는 앨버스톤스라고 하는 지경이니 말이죠. 오역이나 이해안가역과 오해유발역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책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레코드 판에 바늘 올리던 순간, 컴퓨터로 글 쓸 때 한글자도 안 써져서 까만 모니터 앞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던 그 밤, 24장 필름 숫자를 기억하며 아껴 찍던 사진들, 친구랑 만나면 술마시기 전에 당구장부터 향하던 발길 등등. 그런 시절이 미소로 기억되는건 로 테크의 편안함도 있지만, 사람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그런면에서 저자의 에필로그는 동감이 많이 됩니다.

탁월한 도구란 얼마나 최근에 나왔냐가 아니다. 사용자를 확장시키는지 축소시키는지 여부다.

디지털의 집권에 반동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가 대척점에 서서 보완할 때 훨씬 인간은 즐겁고, 교류하고, 생산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에서도 아날로그가 넘쳐나는 1층 로비에 집착하는 기업은 순수 디지털 기업인 이유겠죠. 재미 있었습니다. 아날로그 추억이 한껏 소환되었습니다. 그래서 별하나 더해 다섯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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