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 하면, 대충 그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꺼풀만 들춰 들어가면 또 막상 뭘 알까 싶습니다.
문화의 정의가 뭔지 말로 적을 수 있을까. 문화가 아닌 것은 무엇이고 그 구분의 기준은 뭔지. 문화와 과학은 어디까지 교집합이 있고 어느 지점에서 달라질지. 인간에게 문화는 왜 생겼는지. 그리고 문화는 어떻게, 그리고 왜 진화하는지.
익숙한 단어지만 이렇게 보면 한없이 낯설고 어렵습니다.
존 브록만 편저, 2011
테크놀로지로서의 인터넷이 일상화되고 보편화 되면서 문화의 일부로 들어앉은 2009년이 이 책의 착지점입니다. 그래서 밈과 네트의 결합에 대한 논의가 꽤 큰 부피를 차지합니다. 인터넷이 문화와 상호작용하고, 자가발전하며 고양되는 부분에 시선이 잡혀있는 학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이하게 브라이언 이노는 포괄적 문화이론에 탐닉합니다. 과학과 예술, 합리와 직관의 통합적 서술을 목적합니다. 용처는 모르겠지만 시도가 장하고, 저도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반면 조지 다이슨 같은 이는, 구글 본사를 튜링의 대성당에 비견하며 기술에 찬미를 보내기도 합니다.
이젠 다소 식상한 논의인 네트와 정치의 교점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에브게니 모조로프와 클레이 셔키의 특별 대담은 전원책-유시민 나오는 썰전 같은 말싸움이라 헛웃음을 지으며 보게 되지만, 더글러스 러시코프의 새로운 르네상스란 틀은 인상깊었습니다. 르네상스가 되어 개인이 탄생했지만, 반대급부로 권력은 더욱 중앙화 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된 지금이 진정한 상향식 민주주의가 가능해졌다고 봅니다. 진정한 포럼의 구현을 위한 해법으로 오픈소스 민주주의를 제안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재런 라니에의 디지털 마오이즘에 대한 격론입니다. 라니에는 위키피디아를 위시한 몇가지 예를 들며 익명의 군중에 대한 부작용을 염려합니다. 몰가치한 팩트의 모음, 방향성 없는 편집, 동일한 목소리의 반복이 여론이 되는 문제 등을 지적합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예로 들며, 존레논이 나왔다면 유명해질수 있었을까 묻습니다. 그래서 저역필터를 거친 대의 민주주의의 장점을 거론합니다. 발언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 '위키피디아 악귀'라고 칭하며 디지털 마오이즘을 경계합니다
따라오는 챕터는 이 라니에 글에 대한 다양한 반론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막판엔 위키의 설립자와 공동창업자인 지미 웨일즈와 래리 싱어까지 참전하니 재미납니다. 팩트 기반으로는 라니에가 위키의 생리와 작동기제를 잘 모른다는 논점과, 상위개념으로는 엘리트주의의 제한성에 대한 지적이 나옵니다.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완곡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말들이 재미납니다.
뜻밖의 즐거움도 있습니다.
반문화의 선봉이었던 스튜어트 브랜드는, 환경단체가 환경을 말아먹고 있다는 용감한 스탠스를 보입니다. '도시는 친환경적이다, 원자력은 유용하다, GMO는 쓸모있다' 등 욕먹기 쉽다는걸 알면서도 소신대로 거침없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만큼 많이 공부하고 사색한 결과라 울림이 있습니다.
자레드 다이아몬드의 '어떤 사회는 왜 재앙적 결정을 내리는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 설명의 구조보다 형식이 재미납니다. 몬태나라는 저자 주변 지역의 사례를 분석의 구조에 덧입힙니다. 예측의 실패, 인지의 실패, 시도의 실패, 실행의 실패라는 사회적 현상을 평면적으로 설명한데서 한걸음 나아가 색채를 더하고 주의를 유지하는 우아한 글쓰기란 생각을 했습니다.
Inuit Points ★★★☆☆
책 같기도 하고 매거진 같기도 한 엣지 재단 글모음을 읽는건 항상 즐거움입니다. 이 책은 10년도 넘는 시절의 이야기라 지금 보면 다소 싱겁고 식상한 느낌도 있습니다. 인터넷이 과연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류의 이야기 말이지요. 그리고 문화의 진화에 대해선 인류학, 진화심리학 등이 바싹 달라붙어 꽤 많이 연구를 해뒀기 때문에, 우주시대의 '달엔 무엇이 있을까'같은 동화적 논의가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텍스트 자체보다 컨텍스트로 읽어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과 패러다임이 옮겨가는 시점, 어리석다 생각되고 욕먹을게 예상되어도 고민의 끝에 도달한, 어떤 포지션을 취합니다. 각자 입장 기반으로 서로간 아이디어가 충돌하며 자리잡는 새로운 담론의 과정을 시간 지나 화석처럼 보는 재미입니다. 그 결과로 인류는 보다 눈이 밝아지니까요. 재미난 독서였습니다. 별 셋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