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 책 이야기를 한줄로 줄여보면 정말 재미없습니다.
"시인인 러시아 귀족이 혁명 이후 호텔에 갇혀 수십년 사는 이야기"
시인, 러시아, 귀족, 혁명, 장기감금 뭐 하나 매력적인 키워드가 없습니다.
저 역시 이 책에 대한 좋은 평을 간간히 들었지만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고요. 그런데 독서 중 이런 저런 책에서 자꾸 언급이 되길래 대체 뭘까 싶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뭐 오바마도 탐독했다는 마케팅 문구도 있으니 말입니다.
읽고는 와.. 대단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Amor Towles, 2011
엄청난 필력입니다. 미국 작가가 21세기에 쓴 러시아식 대하소설입니다. 벽돌만큼 두꺼워요. 작가는 톨스토이류의 막대한 분량마저 탐했나봅니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습니다. 지루할 틈 없는 흡인력이 있습니다.
저자 에이모 토울즈 씨는 이력이 특이합니다. 석사까지 영문학을 하고 금융계에서 20년을 재직한 후 소설가로 데뷔했습니다. 첫작품이 10번째 작품같다는 찬사를 받았고, 두번째 작품인 '모스크바의 신사' 는 스토리텔링의 한계를 시험하는듯 합니다.
이야기는 나름 중요한 반전과 복선이 있습니다. 따라서 스포일러가 될 이야기는 송두리째 빼고 말하겠습니다.
우선 시간 틱이 매우 독특합니다. 책장 열자마자 주인공은 감금형에 처합니다. 본인 지내던 호텔에 새로 갇힌 날부터 1일, 2일, 5일, 10일, 3주, 6주, 3개월, 6개월, 1년, 2년, 4년, 8년, 16년까지 두배씩 간격으로 장면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후엔 반감합니다. 1938년부터 다시 8년, 4년 간격인거죠. 이는 우리의 기억구조랑 매우 닮았습니다. 어떤 일련의 의미덩어리 중 처음과 마지막이 잘 기억나지요. 또한 처음과 시작은 변화의 순간이라 물리적 이벤트보다 의미적 이벤트가 더 많습니다.
이 긴 세월동안 호텔 내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만 지냄에도 불구하고, 천페이지 내내 지루할 틈 없이 재미난 에피소드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 이런저련 에피소드로 친구가 생기고, 가족이 생기고, 인생은 몽글몽글 흘러갑니다. 주변 인물에 대해, 책 읽는 도중 드는 인상과 책 말미에 남는 느낌은 꽤 다른 느낌입니다.
다양한 인물이 얽히며, 다양한 층위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이 책에 대해 딱 한가지만 강조하자면 주인공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지요. 신사로 번역된 gentleman은 본디 귀족이란 뜻입니다. 귀족이든 신사든, 로스토프 백작의 좋은 품성이 이 책의 고갱이이며, 은은한 향기의 원천입니다. 분초에 쫒기지 않고 잡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되 풍성한 지식과 지혜로 항상 날렵하게 대응하는 유려함. 귀족이란 태그를 떼어내면, 실은 현대 지성인에 필요한 좋은 기품이기도 합니다.
Inuit Points ★★★★★
별 다섯입니다. 소설에 별 꽉채워준게 아마 처음 아닐까 싶네요. 누가 인생에 관한 책을 물으면 이걸 추천하려 합니다. 단편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축적된 교류 속에 생기는 인연들이 한 축. 상황에 반발하다 굴복하기보다 환경에 적응하여 끝내 지배하는 오롯한 정신이 다른 한 축. 이 두가지 인생의 진리를 마음에 들이고 산다면, 삶은 충분히 향기로울 듯 합니다. 삶에 향신료같은 유머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책 읽다 미국의 김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작가를 알게되어 좋습니다. 4년의 공부와 1년의 집필이 있어야 소설 하나를 쓴다는 토울즈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