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별점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awny Taewon Kim Jan 15. 2022

전라디언의 굴레

리뷰

#1 90년대 쯤, 그런 루머가 있었습니다. 경상도 번호판 달고 전라도 가면 기름도 안 넣어준다고.

#2 제가 오래 살고 있는 이 도시엔 외부에서 안 보이는 투명한 막이 있습니다. (구)성남과 분당으로 대별됩니다. 시의 어젠다로 은연중, 또는 대놓고 통합에 대한 고민들이 거론됩니다.

#3 서울토박이로서 관잘한 점이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은 서울 와서 20년이 지나도 말투만으로도 고향이 어딘지 딱 알겠는데, 전라도 사람은 서울 도착하자마자 서울 말씨에 가까워집니다. 전 그게 사투리의 억셈때문이라고만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실체도 없이, 공기같이 가볍고 간헐적 느낌이었는데, 이 책 읽으며 이런 종류의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고, 몇 개 적어둔 중 적어봤습니다.

조귀동, 2021


제목이 독합니다. 쓰레기 포털의 댓글창에나 보일만한 비칭입니다. 전면으로 끄집어 낸건 고심의 흔적 같습니다. 더 이상 고상함의 언어로는 켜켜이 쌓인 관념을 헤쳐보이기 어려웠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N워드를 흑인이 흑인에게 쓰면 그땐 우호와 연대의 감성이기도 하니, 저자의 정체성을 슬쩍 비친 것일수도 있습니다.


'세습 중산층 사회'로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던 조귀동 저자입니다. 데이터에 근거한 논점과, 그 뒤의 담론이란 측면에서 호평을 받았지요. 그가 '힘 빼고' 썼다는 이 책은 몇가지 점에서 빼어납니다.


첫째, 흡인력 있는 서론입니다. 제가 근년에 본 서장 중 손꼽을 정도로 빼어납니다. 차 타고 광주까지 가는 여정을 적으며 책의 논점을 요약합니다. 어느 시점부터 풍기는 닭똥 냄새, 그 이면 양계산업의 편중, 도심에 보이는 건물과 거리의 역사적 이력 등을 여행기처럼 술술 읽다보면 책의 지향점이 얼핏 잡힙니다. 유튜브 요약 영상처럼, 그 뒤는 독자 스스로 내쳐 읽게 됩니다.


둘째, 경제학을 전공하고, 지금도 사과정 중인 경제기자답습니다. 팩트 기반 스토리 텔링이 눈에 띕니다. 방대한 통계, 논문, 인터뷰를 씨줄 날줄처럼 솜씨좋게 엮어 나갑니다. 피상적으로 접근하지 않아 좋습니다. 흔한 내러티브인, '박정희 이후로 산업을 영남에만 몰아줘 호남이 이꼴났다'라는 단출한 인과적 연원을 스스로 경계합니다. 산업화 과정중 소외로 경제적 초기자본의 배제가 생기고, 먹고 살려 이주하고, 타지 어딜 가든 사회적 피라미드의 밑에서 시작하니 편견을 강화하는 사례가 많을 것은 기존의 생각과 줄거리가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눈길은  너머 이면을 향합니다.  


셋째, 결국 호남의 문제는 우리나라 공통인 지방의 문제란 점입니다. 지역이 경제문화적으로 별볼일 없으니 재능은 수도권으로 유출됩니다. 호남의 경우는 여기에 민주당이라는 양날의 칼이 더해집니다. 5.18과 김대중의 존재감으로 그 외 정치세력은 질식했고, 결과적인 진공상태입니다. 이런 독점적 거버넌스의 결과는 자명합니다. 무능과 부패의 순환과 재생산, 필연적인 양화의 구축입니다. 저자는 잘라 말합니다.

학동 건물 붕괴사건은
수도권에서 볼 때 갑을관계와 하도급 이슈지만,
광주에서 보면 명백한 부패일 뿐이다.  


그나마 개발시대엔 중앙 정부에서 내려보낸 정책자금으로 지방 경제를 지탱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SoC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소출이 100%도 안나오는 성숙경제에서 지방의 문제는 수도권의 문제란 점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지역 토호와 지역을 등에 업은 엘리트들간의 유착적 표거래로 지방에서 줄줄 새는 무능과 부패의 비용을 수도권의 세금으로 감당해야 하니까요.


실은, 영호남 갈등은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지방출신 2세는 정체성이 서울이지 조상의 고향이 아닙니다. 하지만 들춰지지 않은 음지에 곰팡이가 쌓이듯 지방의 문제는 꽤 오래 축적되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전 차별주의자 였을지도 모릅니다. 전라도를 차별하진 않았겠지만, 지방 모두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Inuit Points ★★★★☆

그래도 제목은 셉니다. 누구에게 선물하기 애매합니다. 전라도 사람에게 줘도, 경상도 사람에게 줘도 제목을 보면 '대체 왜 이걸 나에게?' 느낌입니다. 책에 나온대로 반도의 흑인, 아이리쉬 느낌을 부연해서 설명해도 마찬가지일 듯 합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레 추천을 하고 싶습니다. 지방은 지방대로, 수도권은 수도권대로 이미 발생하고 있는 문제니까 말입니다. 재미난 책입니다. 마키아벨리가 자소서로 군주론을 쓴 바 있지요. 이 책은 훗날 조귀동의 군주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별 넷 주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채, 첫 5천년의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