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 수비리 - 빰플로냐 20.5km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을 새삼 실감한다.
잠꾸러기 두 명이 약속한 듯이 알림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깬다. 어제보다 배낭 정리하는 속도도 조금 빨라졌다. 순례길이 끝나갈 때가 되면 후다닥 정리하는 기술이 생기는 걸까?! 엉뚱한 상상은 뒤로 하고 알베르게를 나와 근처 카페로 향했다.
어제 얼큰하게 와인을 마신 덕분에 아침 거리를 미리 사놓지 못했으니
핑계 삼아 카페에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순례길의 셋째 날을 시작한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수비리에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빰쁠로냐라는 곳이다.
순례길 중에 처음으로 만나는 도시이기도 하다. 상점도 많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판다고 하니 절로 신이 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 소식이 계속된다. 날이 쌀쌀하기도 하고 걷다가 멈춰서 우비를 입기도 번거로워 시작부터 우비를 입었다.
한 참 걷는데 집중하다 멈추게 되면 그게 영 별로다.
갑자기 발란스가 깨지는 느낌이랄까?! 아직 초보 순례자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평온하게 풀을 뜯는 말들 사이로 펼쳐져 있는 숲길을 걷는다.
나도 일찍부터 나와서 걷는다 생각하는데 저 녀석들은 얼마나 부지런하길래 벌써부터 나와있는 걸까.
동물 친구들과 인사도 나누고 작은 숲길을 미로처럼 걸어 지나오니 첫 번째 마을 '라라소냐'에 다다랐다.
'라라소냐'는 중세에는 상업활동이 활발했던 마을이라고 한다.
과거의 활발함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조용하고 한산하다.
어쩌면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나치기 아쉬워 잠시 멈춰 목을 축여본다.
순례자들을 위한 샘물 덕분에 목마를 걱정 없이 걸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목도 시원하게 축이고 물통도 가득 채우니 부자가 된 마음이다.
어떤 길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틀간 만났던 길들과는 다르게 얌전한 느낌이다.
고요한 숲길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금 귀여운 녀석들이 나타났다.
이 녀석은 지나가는 순례자가 궁금한지 철창 사이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본다.
몇 걸음 옮겨보니 더 많은 친구들이 숨어있었다.
무늬가 신기한 녀석부터 작은 녀석까지~~ 이곳이 이 녀석들 아침 놀이터인 것 같다.
잠시 이 녀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순례자의 본분으로 돌아가 걸음을 옮긴다.
말들과 헤어지고 얼마 걷지 않았는데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빰쁠로냐에서 11km 떨어진 '수리아인'이라는 마을이다.
우리는 마당에 순례자 조형물이 있는 작은 카페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서니 이미 다른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사람은 참 비슷한 느낌이 든다.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쯤에 카페가 나타나고 어김없이 그곳은 순례자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달달한 도넛과 따듯한 커피 그리고 상큼한 오렌지 주스 한 잔으로 재충전을 해본다.
흐린 하늘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우비를 벗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길을 나선다.
덜 마른 양말과 신문지를 넣어둔 비닐봉지 덕에 뒷모습이 근사하진 못하지만 순례자 느낌은 물씬 난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해본다.
마주하는 길들이 잔잔하니 주변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많이 생긴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밀밭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만든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나타나는 푸른 자연의 모습에 마음이 풍족해진다.
바람이 놀러 오면 밀밭이 신나게 춤을 춘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이다.
첫날 피레네를 넘고 이튿날 내리막길에서 고생한 순례자들을 위로라도 해주려는 듯한 잔잔한 길들과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이다.
길이 평탄하니 걸어도 걸어도 지치지 않는 기분이다.
얼마를 걸었을까 하는 사이 작은 다리를 마주했다.
이 다리는 우리를 '뜨리니닷 데 아레'라는 마을로 인도해 줄 것이다.
삼위일체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마리스따스 수도원과 바로 이어져 있는데 이곳은 현재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로 운영되고 있으며 과거 17세기에는 다치거나 아픈 순례자들을 치료해주거나 말에 태워 론세스바예스로 보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리 위에서 마주하는 마을의 모습도 참 아름답다. 핸드폰과 기억 속에 사진을 한 장씩 남기고 다리를 건너 수도원 성당에 들려본다.
13세기 초반에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성당의 내부는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어있었다.
성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걷는다.
마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마을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제법 도시 느낌이 나는 듯한 마을이다.
잠시 쉬어갈 마음에 카페나 바를 찾는데 마을 규모와 다르게 전혀 상점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반쯤 포기 상태로 걷다가 작은 가게를 만났다.
누가 봐도 순례자들이 쉬어갈 법한 느낌의 가게~~
하지만....간단히 빵과 커피를 시키려는 우리의 계획은....수포로 돌아갔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아주머니께 메뉴를 물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아주머니께서는 오늘의 메뉴를 가져다주신 것 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의 메뉴'는 보통 샐러드, 메인, 디저트 그리고 커피로 구성된 코스요리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스페인어가 짧았던 우리 탓이라 여기고 맛있게 식사를 하고 서둘러 빰쁠로냐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을 지나 도시길을 조금 더 걸으니 중세 다리인 '막달레나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 성벽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니 프랑스 문이라고 불리는 '수말라까레기 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식사한 곳에서 프랑스 문까지 3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였는데....조금만 참고 왔으면 빰쁠로냐에서 더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프랑스 문을 지나 드디어 빰쁠로냐에 입성했다.
빰쁠로냐 대성당 오른편에 위치한 공립 알베르게에 침대를 배정받았다. 알베르게 요금은 1인당 9유로이며 침대와 베개 커버도 별도로 제공해준다.
이전에 수도원 건물을 개조한 곳이라 넓은 공간에 약간의 파티션을 두고 2층 침대들이 쭉 나열된 형태로 총 2층이다. 주방과 세탁실도 잘 갖춰져 있어서 많은 인원이 사용하기에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제일 먼저 핫 샤워를 마치고 동네 구경에 나섰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대성당이다. 성당은 미사 시간과 기도 시간 이외에는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마침 저녁에 묵주기도 시간이 있어 그때 다시 오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큰 도시인만큼 까르푸가 있다. 신난 마음에 간단히 카레에 들어갈 야채와 맥주를 샀다.
까르푸 옆에 작은 중국인 슈퍼도 있어 비상식량으로 신라면과 튀김우동도 사두었다.
한국에서는 잘 먹지 않는 라면인데 여행 중에 만나면 왜 이리 반갑고 든든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ㅎㅎ
알베르게로 돌아와 맥주를 곁들인 카레로 저녁을 먹고 무거워진 엉덩이를 겨우 들어 다시 성당으로 향했다.
우리는 묵주기도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덕에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내부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스테인글라스에 비친 제대의 모습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기도 시간이 다가오고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성당에는 순례객들 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분들도 많이 계셨다.
한국에선 한 번도 평일 묵주기도에 참여해본 적 없다는 사실이 조금 창피하게 느껴졌다.
총 5단을 바쳤는데 마지막 단은 모두가 성당을 돌면서 기도를 바쳤다.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무사히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음에 그리고 이런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남은 순례길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드렸다.
성당을 나서니 어느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자연의 순리가 우리의 순례길 3일 차도 저물어 감을 말해준다.
하루하루가 서로 대견하다.
이렇게 즐겁게 행복하게 함께 걸어주니 남편에게 새삼 감사함을 다시 느낀다.
엄마 말에 의하면 와이프가 윽박질러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인데 말이다.
순례길을 걸으며 작은 것 하나하나에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더 많이 감사하게 되고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 길의 끝이 아직은 저 멀리 있지만 내딛는 발걸음마다 지금 같기를....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