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승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올랐다.
바탐까지는 6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한국과의 시차는 -2시간이었다.
3-3 형태로 된 기내 좌석에서 창가 쪽인 내 자리 바로 옆에는 사람이 없었고, 통로 쪽 자리에는 아까 대기실 근처에서 본 단체 관광객 중 히잡을 쓰신 한 분께서 앉아 계셨다. 그들이 구매하신 기념품은 각자의 짐이 한 보따리씩 되어 내 캐리어를 올려둘 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바로 앞자리 칸에 짐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내 뒤에 서 계셨던 분께서 짐을 올려주셨다.
"Terima kasih(감사합니다)."
내 자리에 앉았는데, 내 옆자리에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옆 자리인 통로 자리에 앉아 계신 분께서 올려두신 듯한 짐들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짐을 정리하시면서 그분이 말씀하셨다.
"Sorry.(미안합니다.)"
"Sama-sama.(괜찮아요.)"
인도네시아어로 대답하는 내 말에 그분께서 흠칫 놀라시며 되물으셨다.
인도네시아어를 하는 한국인이 신기하셨던 것 같았다.
"Tinggal di Batam?(바탐에 살아요?)"
"Saya tinggal di Korea.(저는 한국에 살아요.)"
바탐에 사는 한국인 유학생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Bagaimana caranya bisa berbahasa Indonesia?(인도네시아어를 어떻게 할 줄 알아요?)"
"Saya belajar bahasa Indonesia delapan bulan.(인도네시아어를 8개월 배웠어요.)"
그분은 투어리스트로 오신 바탐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해주셨다. 바탐에서 인도네시아인 관광객을 모시고 한국에 들어와서 인솔하며 관광 안내를 해주고 다시 본토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말 그대로 "풀 코스 가이드" 일을 하고 계셨다. 여권에 찍힌 출입국 도장들을 보여주시면서 한국에는 벌써 여섯 번째 오셨다고 했다.
제주항공 바탐 직항 운항 덕분에 일이 더 편해졌다고 하셨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바탐으로 가고, 인도네시아인 관광객들이 한국으로 오는 길이 열린 것.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길이었다.
"Kenapa belajar bahasa Indonesia?(왜 인도네시아어를 배우세요?)"
왜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냐는 질문에, 나는 연수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했다. 처음엔 취업이 목적이었지만, 끝난 후에도 배운 언어가 아까워서 계속 공부했다고. 그리고 이번에는 실력을 확인하러 바탐에 간다고 했다.
"Hebat!(대단해요!)"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해 주셨다.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주 3일, 하루 2시간씩 배워서 그런가?
생각보다 더 인도네시아어를 술술 말하는 나 자신이 놀라웠다.
배운 단어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말하는 게 이렇게 자연스러울 줄이야!
바탐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바탐에는 매우 아름다운 자연 풍경들이 많다고 소개해 주셨다.
그러면서 내일도 점심때 해변가를 산책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Nanti kita ketemu besok, ya?(내일 만나요, 알겠죠?)"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기 전 짧은 몇 분 동안 WhatsApp(카카오톡같은 문자/전화 앱)도 교환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나는 깊이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자고 일어나니 기내식으로 주문하신 라면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Untuk kamu.(너 주려고.)"
옆자리를 양보해 드려서 고마우셨던 건지, 그분께서 날 위한 라면이라며 먹으라고 하셨다. 사실 잠깐 뒤척이며 일어났을 때 옆에서 컵라면을 드시는 모습을 봤었는데, 내 것까지 주문하셨을 줄이야.
"Terima kasih banyak!(정말 감사합니다!)"
기내에서 처음 먹어본 라면은 국물은 적었지만, 다행히 많이 불어 있지 않았다.
따뜻한 국물과 함께 마음도 따뜻해졌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자도 자도 여전히 비행기 안이었다. 재생 시간이 긴 영상들을 유튜브를 통해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왔는데, 몇 번을 돌려 봤는지 모르겠다. 창밖을 내다봤다.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 인도네시아가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72시간을 인도네시아어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막연했던 두려움이 비행기 안에서의 대화 덕분에 조금은 줄어들었다.
8개월 배운 초급자의 인도네시아어가 통했다. 옆자리의 처음 만난 분과도 한참을 수다 떨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무한의 굴레를 지나 드디어 도착 안내 방송이 나왔다.
6시간 반이 걸려 도착한 바탐 공항은 정말 작았다. 제주공항보다 더 작았다. e비자를 발급받은 사람들은 자동 심사 라인에 줄을 서면 되었다. 예상과 달리 비자 서류 인쇄물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운로드한 파일만 있어도 됐다. 왕복 항공권도, 숙소 확인서도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공항을 나오면서 세관 신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세관 신고서 QR코드를 스캔하라는 말에 세관 신고를 하지 않았던 나는 어떤 QR코드인지 몰라서 헤맸더니 직원분께서 친절하게 세관 신고를 도와주셨다.
드디어 입국 완료. 공항을 나서니 덥고 습한 바탐의 밤공기가 느껴졌다. 11월 말 한국의 쌀쌀한 날씨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입국하는 순간부터 출국까지, 영어 없이 인도네시아어만으로 72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기내에서 만난 그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Hebat!(대단해요!)"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던 모습. 따뜻한 라면을 건네주시던 손길. WhatsApp을 교환하며 내일 만나자던 약속.. 공항을 나서며 심호흡을 했다.
'Ayo, saya bisa! (자, 나는 할 수 있어!)'
공항에서 호텔까지 약 30분, 진짜 첫 실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