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면서 떠올린 것들

by Taylor

이 브런치 북은 철저히 운문을 위한 것이지만, 나는 본래 산문만을 읽는 독자이자 산문만을 쓰는 작가이므로 짧게 내가 쓴 글들에 담긴 나의 이야기를 적어보고 싶었다.

먼저 가장 첫 번째로 쓴 시,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이 시들의 모임의 제목이기도 한 기념비적인 시이다.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선언한 것을 글에 녹여 적었다. 얼마나 서투른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알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을 가장 첫 번째로 배치하고 싶었다. 그만큼 이 시는 내게 카뮈의 안과 겉만큼이나 독특한 역할을 한다. 내 모든 시는 어쩌면 이 조악한 글자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내 글들을 읽으려 시도하는 독자가 생긴다면 그 시를 유심히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그야 그것이 마음에 든다면 내 글이 마음에 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이정표의 역할이다. 나의 문학 세계의 안내문.

Oasis의 Stop Crying Your Heart out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아시스의 곡 중 하나다. 어느 순간 우울해하느라 힘이 들면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주황빛 석양이 아름답게 내리쬐는 하늘을 말이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 항상 저 곡이 떠올랐다. 네 심장이 터지게 우는 걸 멈춰, 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심장이 터져라 울었다. 그 순간을 글로 쓰고 싶어서 쓴 것이 <재회>였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한 명의 소년과 연락이 닿았을 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짧은 시를 정말 좋아한다. 오아시스와 그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지만 이 시속에서 그들은 환상의 짝꿍이다. 완벽한 조화다. 나는 그래서 이 시를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혁명>은 시험적인 글이었다. 그리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수준이지만, 이후에 내가 쓸 <여전히 우리에게 삶이 있다고 믿는가>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 글이다. 그래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올리고 싶었다. 요즘 들어 그렇게 반항적인 마음이 든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우리는 불만을 가져야만 한다. 일종의 여드름처럼 터뜨리지 않으면 참지 못 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나의 글과 만나면 꽤나 재미있어진다. 적어도 쓰는 나에게는 말이다. 분노와 짜증을 담아 쓰는 것이다. 불만을 터뜨린다.

<눈물을 쌓는 일>, <너 대신 네가>, <서울로 떠나는 길의 배웅>은 하나의 연작 시이다. 외로움 3부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시들이다. <눈물을 쌓는 일>을 쓰고 나는 곧바로 <너 대신 네가>를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떠나는 길의 배웅>을 적었다. 외로움은 이렇게 길게 풀어써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감정이기 때문에 이런 글들이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같은 사람들은 항상 불안에 떠는 한 마리의 강아지 같다. 그랬기에 <눈물을 쌓는 일>의 화자는 강아지처럼 이라는 표현을 쓴다. 단순히 사랑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랑은 단순히 연인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정과 혈연, 그 모든 사랑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은 사람은 길 잃은 강아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울 순 없다. 울면 무너진다. 마지 <재회>의 화자처럼 말이다. 그러니 안 쪽으로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 대신 네가>에서 '너'는 내가 항상 시에서 사용한 청자이다. 서투르고 시를 쓰는 법을 몰랐기에(여전히 모른다.) 나는 너를 무조건적인 청자로 내세웠다. 같은 식으로 눈물이라는 시구를 정말 많이 사용했다. 나는 나의 서투름에 정면으로 맞서고 싶었다. 내가 청자를 계속 '너'로 내세우는 데에는 내가 그렇게 이야기할 누군가가 필요했기에 그랬다는 하나의 고백이다. 그리고 이 글의 화자는 어쩌면 전작의 화자와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 마음을 꼭 짜주길 바라는 너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들만 안다. 우리는 멀리서 끊임없이 추측해야 할 뿐이다.

<서울로 떠나는 길의 배웅>은 이러한 외로움의 절정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몸짓, 눈빛, 말투가 곧 하나의 메시지가 되어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끝끝내 읽어내야 한다. 나는 거짓말한다.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읽는다. 그러나 그를 거짓으로 바꿀 순 없다. 서울이라는 곳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화자는 결코 갈 수 없는 곳이다. 시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화자와 그는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낸다. 그들은 그곳에서만 하나일 수 있다. 만일 그가 서울로 가게 된다면 더 멋지고, 유쾌한 이들로 꾸려진 인간 집단을 끌고 가리라는 것을 화자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화자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내가 느낀 외로움을 이렇게 글로 표현함으로써 나는 어떤 해방감을 얻었다. 또 외로움은 오랜 친구처럼 우리가 그의 어깨에 기대도록 기꺼이 내어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적어도 나는 안다.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보다 과감하게 우울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울하고 고통스러워서 죽으려는 화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죽음은 나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편견 아닐까? 편견은 결국 시선에 속하는 것이므로 화자는 죽음으로써 편견, 나아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는 그 벼랑에 몰린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검은 하늘 아래에서 철썩철썩 모래를 때리는 검은 바다가 나를 처음으로 안으려고 할 때를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쓰고 나는 충동적으로 올렸다. 그것은 또 다른 선언이었으므로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화자가 아닌 나는 죽지 않았다. 편견 속을 살고 있다.

<부끄러움>은 아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실은 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는 전작과 표제작을 모두 아우르는 내가 벗어나려고 했던 모습을 담았다. 그 이름조차 두려운 부끄러움을 나는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글이다.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글 중 하나일 것이다. 아직 올리지 않은 글인 <낙원> 역시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 글 역시 누군가에게 읽히도록 만들고 싶다.

<부끄러움>이 내가 벗어나려고 했던 나의 모습을 담았다면, <세계를 떠나는 일은 즐겁다>는 내가 떠나고 싶었던 세계를 그렸다. Creep의 화자처럼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적었다. 세계를 떠나서 나 혼자,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외로움을 껴안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즐겁다. 당신들이 없으니까. 그것이 외로움이라면 나는 묵묵히 견뎌야 할 것이다. 이 글 역시도 내가 아주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적었던 <못 다 익은>은 성장이라는 부담에 대해 의문이 들었던 경험을 기반으로 적었다. 엄마와 함께 집에 가는데 단풍나무를 보고 엄마가 말했다. "나무가 빨갛게 물든 나뭇잎도 있고 아직 파란 부분도 있어. 신기하지 않아?" 나는 매우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렇네요." 그게 언제의 일인지 떠오르지도 않는다. 아주 먼 과거의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떠오른 순간 나는 거기서 아직 못 다 큰 하나의 어른을 보았다. 다 큰 어른이란 없는 거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아주 쨍쨍한 햇빛을 고루 받은 나무는 잘 자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한쪽 면을 다 포기해야 한다. 한 구석은 어린아이인 채로 사회에 나가야 한다. 사회는 불완전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이들만을 추구한다. 나는 그것이 서글펐다. 그래서 그렇게 적었다. 우리는 다 못 다 큰 아이라고.

이 글이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갈 <파르마의 페르마타>도 누군가 좋아할 만한 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는 또다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을 쓰고 싶다. 내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터놓는 일은 항상 즐거움이므로. 마치 세계를 떠나는 일처럼 말이다. 끝으로 나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 행복해질 수 없다면 조금 덜 불행해지기를 바란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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