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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자기 Sep 16. 2020

무너지는 새벽녘

2020년 9월 13일 일요일

현재 시각 새벽 1:17


필라델피아 날씨: 맑음

내 마음의 날씨: 허리케인




미국 동부는 허리케인이 가끔 찾아온다. 내가 사는 필라델피아 지역도 마찬가지. 3주 전쯤? 한 달 전쯤이었나? 허리케인 이아이시스가 상륙했다.


그때 우리는 여름휴가 차 뉴욕주 몬톡에 있었다. 엄청났던 허리케인이 기억난다. 롱아일랜드 전체가 정전사태를 치르기도 했다. 모든 불이 다 꺼져버린 도시를 4시간 동안이나 견뎠다. 묵었던 숙소의 사람들과 코미디 재난영화를 잠시 찍기도 했었다.


그날 봤던 환한 달이 떠오른다. 화려한 도시의 빛이 모두 사라진 그곳에서 홀로 환하게 빛나던 보름달. 아니, 정확히는 보름달은 아니었고 보름달 직전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혹은 직후였던가.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그날 말없이 떠있던 환한 달처럼. 그까짓 임신쯤. 뭐 이번에 안되면 다음에 되겠지. 가볍게 생각했다. 가볍게 생각한 줄 알았는데.




잠을 못 자고, 체하고, 변비에 걸리고.


위장이 계속 아프다. 역시 몸은 정직하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계속 스스로를 속여온 결과가 이것인가.


몸이 아프니 옆에 있는 폴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이건 다 네 탓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다 너의 잘못이야! 그러나 실은 알고 있었다. 이건 모두 우리의 잘못이란 것을.


그냥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다. 4시간이 넘는 논쟁.


이것은 결국 책임 공방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감정이 상하고 결국은 눈물을 흘려버렸다. 나의 눈물을 보고 그만 좀 울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더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고.


책임 공방에서 감정 공방으로 변질된 우리의 말다툼. 그 크기는 점점 커졌다.


스노우볼.


처음엔 작은 눈덩이였는데, 어느새 눈사람 수준의 것을 넘어버렸다.


결국 대책 없이 커진 눈덩이는 와르르 무너져 버렸고, 엄청난 눈보라를 일으키며 우리를 덮쳐왔다.


새벽 3시 반까지 이어진 이 공방은 결국 끝이 났고, 배가 아팠던 나는 훌쩍거리며 거실로 나가 텀스(Tums)를 먹었다. 과일맛이 입안에 퍼지고 위산이 누그러졌다. 그 상태로 나는 아침 8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속상한 일이 터지면 원래 더 다투는 법이라고 한다. 감정이 곤두서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을 뱉어버리며 미친 사람처럼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사실 정석대로라면 그럴 때일수록 서로를 위로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이 맞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당시엔 그게 보이질 않으니까. 그 상황의 감정에 취해 서로에게 더욱 짜증내고 화를 내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일이 생겨도 폴은 쿨쿨 잘만 잔다. 머리를 대자마자 5분 컷. 그래, 다행이다. 너라도 이렇게 잘 자서.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속이 편해서.


토요일 오전. 벌써 기분이 다 풀려버린 폴은 팔랑팔랑 나비처럼 다가와서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아직도 날이 곤두선 나에게 달달한 행동을 하는 너의 모습. 황당하다. 


나도 화가 오래가는 편은 아니다. 정말로 커다란 화가 나면 아마도 반나절 정도? 반면 폴은 5분 정도 간다. 거짓말처럼 5분 뒤면 화가 다 사라지는 사람이다. 부러운 성격이다.


화가 풀린 폴은 나에게 와서 살살거린다. 그럼 아직도 앵그리 수치가 맥스인 나는 그게 너무 더 짜증이 난다. 사실 폴은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동생이랑도 같은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형제 사이의 혈투가 끝난 뒤, 단 5분 만에 아무렇지 않게 시동생에게 일상적인 대화를 걸었다고 한다. 시동생은 그게 너무 약 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고 나에게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마음을 100번 이해한다.


하루의 시간이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저녁때쯤 폴이 나에게 다가와서 살짝 팔짱을 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줬다.




어느덧 위산이 역류하던 느낌은 옅어졌지만 이제는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 이 짓을 또 반복해야 한다니. 


그래도 다음번엔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이길 기대해본다.


제발.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날의 말다툼은... 절레절레. 감정이 곤두설때마다 주문을 외우자. 한번만 더 생각해보고 말을 뱉자고.

<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한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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