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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자기 Sep 28. 2020

두 번째 인공수정

2020년 9월 26일 토요일


필라델피아 날씨: 아침에 약간 비, 흐렸다가 늦은 오후부터 맑아짐

내 마음의 날씨: 주룩주룩 내리는 비




오늘은 두 번째 IUI(인공수정)을 하는 날이다. 이미 한번 해봐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떨린다. 


사실 나는 어제 저녁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어제 또 크게 다퉜는데,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Paul이 결국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하고 내 화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참고로 이번 난임치료 과정 중 우리의 말다툼 프로세스는 대체로 이렇게 진행됐다.


(검사 결과 기다리기, 트리거샷 주사 등) 큰일을 앞두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 폴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틱틱거린다 -> 폴이 삐진다 -> 내가 더 크게 삐지며 논쟁을 시작한다 -> 폴이 말실수를 한다 -> 내가 화를 낸다 -> 폴이 더 크게 화를 낸다 -> 말다툼이 된다 -> 내가 폭발한다(대체로 눈물) -> 폴이 나보고 감정 관리, 스트레스 관리를 잘하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 폴이 말하는 불만에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 -> 그 죄책감 때문에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 -> 자책한다 -> 폴이 처음의 말실수를 사과한다 -> 결국 나도 감정 관리 잘하겠다고 대답하며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어제 저녁은 내가 그냥 넘어가질 못했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싸워야 할까.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아기를 갖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들었다. 이런 상태로 아이를 가져봤자 태어날 아이도 나도 폴도 모두 불행해지는 결과만 가져올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밤늦게까지 Paul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다. 나는 역시 아이를 원한다. 우리의 대화가 끊어지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언젠가 해결점을 찾게 되겠지.




토요일 아침.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마치 내 마음처럼. 그러나 슬픈 마음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Paul은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담감을 안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정자 채취를 했다. 9시 반 예약이기 때문에 빠르게 달려갔다. 저번에 첫 번째 인공수정을 위해 갔던 같은 오피스다. 


35분을 달려 도착한 필라델피아 북쪽에 위치한 KOP 지점 오피스 입구



그래도 나름 한번 해봤다고 이번에는 좀 익숙하다. 리셉션 데스크에 정자 샘플을 놓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리셉셔니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간호사 로라다. 아무래도 간호사들이 여러 지점에서 로테이션 식으로 이동을 하는 듯?


어쨌든 저번과 또 같은 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45분의 시간 동안 건강한 정자 샘플을 선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아보카도 샐러드를 먹었다. 캐모마일 시트러스 티와 함께. Pual은 랩과 민트초코 라테를 먹었는데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였다.




아침을 먹고 부랴부랴 오피스에 들어가자마자 처음 보는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시술을 받아야 할 의료실에서 정자 샘플과 검사 수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모든 상황은 완벽했다.


오늘 인공수정 시술을 위해 들어온 의사는 처음 보는 여의사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라스트 네임을 보니 아마도 러시안 같다. 


떨고 있는 나에게 의사와 간호사는 너무 잘해줬다. 시술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1분도 안되어 끝났다. 허무할 정도로 짧은 시간.


너무 허무해서 오피스를 괜히 천천히 걸어 나왔다. 오피스 복도에서 맘에 드는 그림도 발견해서 한 장 찍었다. 밝고 노랑노랑 하면서도 뭔가 형이상적인 느낌도 나는 흥미로운 그림.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내 시술을 함께한 간호사가 나를 보고 웃는다. 자신도 그 그림을 제일 좋아한다면서.


기분이 좋다. 느낌이 좋다.


뭔가 될 거 같다 이번엔.




12시쯤 집에 돌아왔다. Paul은 어제 저녁에 우리가 논쟁했던 그 결과값으로 집을 나섰다. (어제 우리가 말다툼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오늘 혼자 있기 싫었다. 그러나 폴은 직장동료와 놀러 가기로 했다. 이미 약속을 깨기는 어려운 상황. 내가 결국 나가서 재밌게 놀라고 하고 넘어갔다.)


오늘만큼은 집에 혼자 있기 너무 싫었던 나는 이번 여름에 새로 사귄 친구를 초대했다. 친구는 남편, 귀염둥이 아들과 함께 왔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사는 언제나 즐겁다. 사실 이 친구의 직업은 산부인과 전문의, 생전 처음 사귀는 의사 친구.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이런 친구가 내 필라델피아 인생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유쾌하고 마음이 따뜻한 고마운 친구. 점심을 함께 먹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포근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는 4시 반쯤 돌아갔고 Paul은 저녁 8시에 돌아왔다. 그 사이 혼자 집에 있는 동안 외로웠고, 결국 화가 났지만 참았다. 더 이상 화를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면 결국은 내가 아프니까. 그래, 그냥 Paul이 재밌게 놀다 왔으니 된 거다. 어제 사과했으니 된 거다. 깨기 힘든 약속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나도 오늘 즐거운 점심시간을 가졌으니 된거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저번 첫 인공수정을 했을 때는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이번에는 괜찮은 것 같다. 마음을 다스리고 아가 천사를 기다리겠노라 다짐한다. 그러자 자장가같은 고요함이 마음 속 어딘가에 자리잡았다.


되겠지. 이번엔 되겠지.






아직도 그 30초간의 인공수정 순간이 기억난다. 그 살짝 따끔했던 감각이. 잘 참았어. 잘 견뎠다. 

근데 이제 이렇게 큰일을 앞두고 싸우는 것은 그만하고 싶다. 우리는 둘 다 감정적인 사람들이라 이게 참 힘든 것 같다. 좀 더 지혜로워지자. 

<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한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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