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딩크부부 이야기 (2)
결혼 7년 차. 사람들의 관심.
나를 미치게 하는 사람들의 질문들. 그리고 나를 더 미치게 했던 건 아직도 엄마가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
난임병원.
두 달 간격으로 3번을 시도했다.
그렇게 지나간 반년의 시간.
2020년의 나는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항상 ‘희망’을 두려워했다.
그 당시의 나는 ‘다음엔 될지도 몰라’라는 유리병 속에 갇혀있는 바닷물 같았다. 아무것도 품지 못한 채.
28살의 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으며 생각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될 거야. 행복한 엄마가 될 거야.‘
어릴때부터 몸이 약했던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되고 싶으면 얼른 결혼해야한다고. 척추측만을 앓았고, 무엇보다 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 있었다.
희발성 월경, 지나치게 많은 난포.
몇 글자로 정의 내려진 나의 진단.
20대를 함께한 정말 사랑했던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던 이유는 단순했다. 나와 동갑인 그 친구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31살에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를 기다릴 수 없었고,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나는 28살에 결혼해야만 한다고.
결국 그 말은 전하지 못한 채 26살의 미성숙한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남자친구, 1년 반의 열애 끝에 맺은 부부의
연. 눈이오던 그날 나에게 무릎을 꿇고 수줍게 프로포즈를 하던 그 남자.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그럼에도 나는 결국 혼자였다. 그 철제로 만든 차가운 침대 위에서.
병원, 주사, 배란, 호르몬, 대기실…
그 모든 단어 뒤에 따라오는 감정은 하나였다.
혼자라는 느낌. 철저한 혼자.
나는 엄마 후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 벤치에서조차 쫓겨났고 혼자가 되었다. 5년 전의 기억인데 아직도 생생하다. 쇠로만든 차가운 침대.
모든 순간의 감정들이 기억난다. 스위치가 켜지듯.
인공수정이었다. 3번의 쳇바퀴.
그 시절 나는 결국 혼자라는 걸 또 확인했다. 내몸이 아픈건 나밖에 모른다. 내 슬픔과 우울은 나밖에 모른다. 그게 더 슬펐던 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공수정을 하던 6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기뻤던 날이 하루도 없었다. 내가 다시는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그중 유일하게 홀가분했던 날은 아직도 기억난다.
2020년 10월 10일.
그날 우리는 두 번째 인공수정에 실패하고, 그 주말 바다에 갔다.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을 멍하니 봤다. 그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억이 난다.
새벽 바다를 향해 달려가던 어두운 차 안.
나는 계속 종알종알 떠들었다. 실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쓰고 있던 웹소설의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기분 좋은 음악을 틀어놓고, 계속 떠들었다.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차오를 때면 그냥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계속 재미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웹소설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덧 바다, 떠오르는 해를 보고 오전 시간을 다 보냈다.
2020.10.10
10시 10분이 되었다.
“어? 그러고 보니 오늘 10월 10일이네. “
”그러네. “
”지금 10시 10분이다! 신기하다. “
”하하, 그러게. “
”신기하니까 캡처해 놔야지. “
찰칵-
우리는 그 환한 바닷가에서 마주 보며 웃었다.
두 계절을 보내는 동안 처음 웃었던 것 같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3번째 인공수정.
주사를 맞고, 결과를 기다리고, 생리를 확인했다.
아무도 축하하지 않았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았다.
나는 시험관 실패자였다.
누구도 나를 실패자로 부르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나만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