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자리가 바뀐 여자
그토록 염원했던 엄마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맞이한 서른 살 생일. 이제 한국 나이로도, 병원에서 인정하는 만 나이로도. 결국 서른은 내 앞을 지나가 버렸다.
서른 번째 생일은 아직도 선명하다. 정말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날. 내 인생 처음으로 욕이 나왔던 그날.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스스로도 무서울 만큼 임신에 집착하고 있었다.
나는 왜 미국에 살고 있는 걸까. 아이도 없이.
남편과 결혼한 이유는 분명했다. 나를 꼭 닮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꿈은 무너졌다.
서른 살, 사람들은 아직 젊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인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전혀 늦지 않았다’고 말했고, 그 말이 전부인 듯한 시선 속에서 나는 포기와 희망 사이를 오가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서른에서 서른둘까지, 그 시간은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조차 없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반복, 그 2년은 허무와 낙망이 뒤섞인 나날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임신하기에 괜찮다’는 나이였기에 버틸 수 있었고, 하루라도 즐겁게 살아보려 애썼다. 그러나 노력과 상관없이 마음속에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우울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그리고 32살의 겨울, 나는 커리어를 바꾸기로 마음먹고 회사를 그만두고 코딩 부트캠프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가 아마 스트레스가 가장 극에 달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지금의 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되어야 할 내가 지금 코딩을 배우고 있다니. 지금 둘째를 뱃속에 품었어야 할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열심히 수업을 따라갔고, 즐겁게 배우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에‘이게 맞나? 이게 맞아?’라는 의문이 하루에도 몇십 번씩 피어올랐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나는 정기점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 그저 1년에 한 번 하는 통상적인 검진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의사와 얘기를 하다가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도저히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의사는 나를 빠르게 응급실로 보냈다.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다 마치고, 나에게 내려온 진단은 '우울증'이었다.
우울증 이라니!
내 인생에서 가장 거리가 먼 단어 같았다. 안 좋은 상황에서도 좋은 점을 보려고 애쓰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밝은 면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내가?
의사에 권유에 따라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다. 상담을 통해 나는 내가 얼마나 아이를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 건강 상태에 대해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쯤 갑상선 문제도 생기기 시작해서, 갑상선 약을 6개월 넘게 복용해야 했다. 다행히 6개월 뒤 갑상선 수치는 정상이 됐지만, 우울증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커리어를 그만두고 아이를 만드는 것에만 전념하겠다고. 그동안 무신경했건 남편은 이제 약간 심각성을 깨달은것 같았다. 아무래도 응급실 사건과, 나의 건강 상태, 그리고 여자의 생체 시계에 대해 조금은 이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의 사촌들이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 아마 그도 조급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난임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