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주제를 알라, 이미 안다.
DJ: 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전하지 못할 말을 대신 전해드리는 코너, <마음 우편함>입니다. 사랑했지만, 말하지 못했던 그 마음. 원망했지만, 차마 전하지 못한 그 말.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미소로 꺼낼 수 있는 기억들까지…
오늘은 S시에 사는 한 청취자분이 보내주신 편지입니다. 제목은 '네 주제를 알라, 이미 안다.'입니다.
(잔잔한 배경음악 흐름)
안녕, 해야. 나 같은 걸 기억하려나? 난 말이지, 너만큼 날 긴장시켰던 사람을 아직도 못 만났어.
너는 정말 멋지고, 똑똑하고, 사람들을 이끌고, 에너지가 강한 사람이었어.
네 언행이 나한테 상처가 많이 됐지만, 그냥 네가 좋아서 버텼어.
너와 나의 시간은 겹쳐졌다가도 금세 멀어지기를 반복했어. 그 시간 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났는데, 네가 내 머릿속에 살아서 힘들었어. 사실 내 연애는 네가 다 망쳤다. 원망 좀 할게.
넌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지 않았겠지? 너의 사회적 지위, 재력, 멋진 가족들…
나는 이물질이라 선을 넘을 수 없었을 거야. 가끔은 네가 처참해져서 나와 같은, 혹은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길 바랐어. 그럼 널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이름 없는 산골짜기에 무너져가는 집에서 너랑 나랑 농사를 짓다가 산새를 바라보면 그게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다. 이 상상은 5초 정도 하다가 너무나 말이 안 돼서 금방 접었어.
너는 너무 견고해서, 나랑 같은 눈높이의 사람이 되지 않았을 거야. 너의 눈 속에서 ‘더 이상의 선은 넘어갈 수 없다’는 눈빛을 읽었어. 주제 파악이 되는 게 그리도 비참할 줄 몰랐어. 너랑 손깍지를 끼고 걸었던 그 길이 생생해서 더 힘들었어.
내가 마지막으로 너한테 ‘더 이상 연락하지 말자’고 했을 때 넌 무슨 생각을 했니.
난 아직도 그걸 말하던 내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생각나. 각인됐나 봐. 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네 곁에 있는 건 너무 긴장되고, 떨리면서, 불안하고, 불행했어. 너랑 연을 끊고도 몇 년간 네 생각이 사라지지 않아서 죽을 때까지 너를 떠올리는 게 내 숙제라고도 생각했어.
근데 요즘 네가 흐려지더라.
흐려지던 와중, 너의 결혼식 사진을 봤어. 넌 역시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공간에서 너의 반려를 맞이했더라.
그분은 네 세상의 틀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겠지? 난 이 생에서 어떤 노력을 해도 네 틀에 맞지 않을 사람이라, 결혼식 사진을 보고도 슬프지가 않았어. 네 옆자리는 ‘욕심’이라는 단어가 사치였거든. 아, 갔구나… 하는 충격은 받았어.
다시는 너처럼 위를 올려다보다가 고개가 꺾이고, 내가 비참해지는 사람에게 끌리고 싶지 않아.
난 너로 인해 너무 오랜 시간 힘들었어. 아마 내가 너를 그리워해야 하는 총량이 정해져 있었고, 그게 이제 소진된 게 아닌가 해.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잘 살아. 아기 얼굴은 보면 좀 힘들 것 같다. 그냥… 잘 살아.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내가 성인군자는 아니야.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괴롭지 않았을 텐데, 그치.
그래도 네 이름 석자 입에 올릴 때마다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네가 어디서든 잘 살길 바란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주제넘은 것 같아. 너는 죽을 때도 고귀한 모양새로 가장 고귀한 관 안에 담길 사람이니까.
다시는 너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퍼붓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평생 마주치지 말자.
DJ : 네… 오래 묻어둔 마음을 꺼내주신 사연이었습니다. 사랑은 때로 우리를 흔들고 아프게 하지만, 이렇게 글로 털어낼 수 있다는 건 이미 치유가 시작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해야라는 이름을 불러본 그 시간, 이제는 조금은 가벼워지셨기를 바랍니다.
사연 보내주신 분께 감사드리며, 다음 곡 이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