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한 모금의 전설
어느 겨울날, 작은 모기 ‘콕찔러’는 극심한 갈증을 느낀다. 꼭 필요로 하는 음료를 마신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마실 것 좀 누가 안 주나.” 하고 중얼거리던 콕찔러는 마침내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건 바로 배불뚝이 눈사람이다. 콕찔러는 눈사람에게
“마실 것 좀 줄래?”
하고 묻는다. 눈사람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콕찔러는 입술침으로 불룩한 눈사람 배를 콕 찌른다.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한 콕찔러는 그곳을 떠나 길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교통경찰에게 날아가 또다시 묻는다.
“마실 것 좀 줄래?”
하지만 교통경찰은 자기 할 일에만 열중한다. 콕찔러는 경찰관의 엉덩이를 콕 찌른다. 여전히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콕찔러는 경찰관의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또다시 날아간다. 콕찔러는 변호사인 서류먼지 씨 쪽으로 날아가 묻는다.
“마실 것 좀 줄래?”
서류먼지 씨는 콕찔러의 말을 듣지 못한 채 소송 기록만 들여다보고 있다. 콕찔러는 서류먼지 씨의 책상 위에 있는 잉크병에 주둥이를 쑥 집어넣고 잉크를 빨아먹는다. 잠시 뒤, 서류먼지 씨는 잉크병의 잉크가 줄어든 것을 알아차리지만 여전히 서류만 들여다본다. 마침내 잉크병은 바닥이 드러난다. 잉크가 떨어진 것을 발견한 서류먼지 씨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서류를 가방에 담은 뒤 집으로 간다. 배가 남산만 해진 콕찔러는 잉크병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서류먼지 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깬 콕찔러는 젖은 날개를 급히 말리며 잉크병에서 빠져나온다. 서류먼지 씨는 겉옷을 벗어 걸어 놓은 뒤, 비서가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빈 잉크병에 검은 잉크를 가득 채워 넣고 곧바로 일을 시작한다. 그 사이 서류먼지 씨의 겉옷 뒤에 숨은 콕찔러는 찰랑이는 검은 잉크의 표면을 보며 극심한 갈증을 느낀다.
“저렇게 맛있는 음료는 평생 처음이었어. 기회를 엿보다가 저 통 안에 다시 들어가야겠어.”
작게 앵앵대는 소리를 이상하게 여긴 서류먼지 씨는 잠시 뒤를 돌아보지만, 이내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에 눈을 둔다. 비서가 점심시간을 알리는 노크를 하자 서류먼지 씨는 그제야 시계를 보고 지갑과 겉옷을 챙겨 나간다. 서류먼지 씨가 자리를 비우자 콕찔러는 잉크병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잉크를 빨아먹는다. 검은 잉크가 콕찔러의 주둥이를 통해 온몸으로 퍼지면서, 평생 해결되지 않았던 갈증이 해소되는 시원함을 느낀 콕찔러는 문득 저 멀리 고향 리치몬드 저수지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떠올랐다. 콕찔러는 ‘이 맛을 가족들도 느낄 수 있다면…’ 하며 생각에 잠겨, 사무실로 돌아온 서류먼지 씨를 뒤늦게 발견하고 재빨리 잉크병에서 빠져나와 그가 걸어 놓은 겉옷 뒤로 다시 숨는다. 식사를 마친 서류먼지 씨는 아직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서류더미를 보며 쉬지 않고 일에 집중한다. 콕찔러는 서류먼지 씨의 행동을 지켜보며, 다시 그가 자리를 뜨기만을 기다린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리자, 저녁식사 시간을 알리는 비서의 노크 소리에 서류먼지 씨는 지친 몸을 일으켜 끼니를 해결하러 나간다. 서류먼지 씨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콕찔러는 다시 잉크병에 들어가 검은 액체를 열심히 마신다. 사무실로 돌아온 서류먼지 씨는 소화도 시키지 않은 채 소송 기록을 분석하던 와중, 오른손에 들린 펜대가 잉크가 얼마 남지 않은 유리병만을 두드리는 생경한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들은 서류먼지 씨는 잉크가 바닥을 보이는 광경을 보고 놀람과 동시에 눈이 뻑뻑한 느낌을 받는다. 서류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지만, 잉크가 저만큼 줄어들 때까지 일한 자신에게 오늘 하루쯤 상을 줘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서류먼지 씨는 겉옷과 가방만 챙겨 비서에게 일찍 퇴근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간다.
불 꺼진 사무실에 혼자 남은 콕찔러는 나머지 잉크를 먹으려 잉크병으로 돌진하던 와중, 자신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던 친구 ‘배고파 형제들’이 떠올랐다.
“그 친구들은 아직도 캠든 타운 다리 밑에 살고 있을까? 그곳은 먹을 것도 넉넉지 못한데, 한 달을 먹지 못해 죽어가던 나를 살려준 친구들을 잊으면 안 돼.”
남아 있는 잉크의 유혹도 뿌리친 채 콕찔러는 옆 동네 캠든 타운 다리로 날아간다. 마침 배고파 형제들이 곯은 배를 채우려 다리 밑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콕찔러는 배고파 형제들을 다시 만나 기쁜 마음에 서둘러 날갯짓을 하며 다가갔고, 콕찔러를 알아본 그들은 주둥이를 맞대며 반갑게 인사한다.
“콕찔러, 너 요즘엔 잘 먹고 다니는구나? 저번보다 주둥이가 두꺼워지고 다리에 털도 더 많이 났어.”
칭찬에 기분이 더욱 좋아진 콕찔러는 배고파 형제들에게 서류먼지 씨 책상 위에 있는 마법의 음료, 잉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고, 이번엔 자신이 도움을 줄 차례라며 앞장서 배고파 형제들을 서류먼지 씨의 사무실로 데리고 간다.
배고파 형제들은 유리병에 들어 있는 검은색 액체를 보고 처음에는 거부감을 내비치며 사양했지만, 콕찔러는 모두 잉크병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뒤 주둥이를 쑥 집어넣고 시범을 보인다. 배고파 형제들은 긴가민가하며 잉크를 맛보는데, 그것이 자신들이 주식으로 삼던 빨간 액체보다 맛있고 단맛이 나며, 마시는 순간 온몸으로 퍼지는 청량감에 일제히 박수를 쳤다. 콕찔러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우리 앞으로 이렇게 모여 파티를 하는 건 어떨까? 너희가 날 구해준 은혜를 꼭 갚고 싶어.”
마침 다리 밑의 식량이 부족해짐을 느끼던 형제들은 제안을 기쁘게 수락하고, 밤이 깊어 자신들의 거주지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매일 서류먼지 씨의 퇴근과 동시에 콕찔러와 배고파 형제들의 잉크 파티가 열렸는데, 이는 동네 주민들에게까지 명소로 소문이 나 모든 굶주린 배를 채우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그렇게 서류먼지 씨의 사무실에서 그들의 ‘검은 파티’가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 옆 골목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있잖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 주는 인간은 좋은 존재야. 덕분에 굶어서 쓰러져가던 내 아버지도 기운을 차리셨어. 우리 이제까지는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앞으로는 베푸는 것이 어떨까?”
그 의견을 믿을 수 없다며 잉크병 안은 온통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지만, 콕찔러가 제일 먼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매일 밤 파티가 끝나면 인간들에게 이 맛있는 액체를 조금씩 나눠 주는 건 어때? 우리도 이렇게 맛있게 먹으니까 인간들도 좋아할 거야.”
모임의 주최자인 콕찔러의 의견에 하나둘씩 동의의 목소리가 나오고, 그렇게 그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배에 가득 찬 검은 잉크를 긴 주둥이를 이용해 밤마다 거주지 주변의 인간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게 되었다.
이렇게 콕찔러와 배고파 형제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인간들에게 잉크 선물을 시작하게 된 것이 인간의 몸에 까만 점이 생기게 된 이유이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점에 혀를 대고 핥아 맛을 보면 달짝지근하고 청량한 맛이 나는데, 그 맛이 바로 서류먼지 씨 책상 위에 있는 검은 잉크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