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을 마치며
안녕하세요. 지구에 n년째 거주 중인 P입니다. 유서 중간 점검 시간입니다.
부모님, 수고하셨습니다.
저같이 예민하고 강한 성격의 자녀를 가지신 것에 상당한 고충을 토로하셨지요. 그때마다 “저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두 분의 유전자의 조합이니, 괴로움의 원인을 당신들 안에서 찾으라”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떠나는 날까지 참 거슬리게 하는 말을 잘합니다.
장례식은 치르지 말아 주세요.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습니다. 수목장을 부탁드립니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좋겠습니다. 미니 웨딩이 유행이라는데, 미니 장례식도 나쁘지 않겠네요.
저는 살면서 참 힘들었습니다. 누군들 삶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괴로웠습니다.
온갖 고통에 절여져 숨 쉬는 것이 죽음보다 괴로웠던 세월이, 그렇지 않은 세월보다 길었습니다. 고통에서 겨우 헤어 나온 후에도 외로움이 가득한 길을 걸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저는 무섭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똑같이 행동해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지요. 그래서 제가 좋았고, 동시에 쓸쓸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서랍과 옷장을 남겨두어 실례합니다. 정리를 잘 안 해서 뒤죽박죽입니다. 모두 헌옷 수거함에 넣어 주시거나, 중고 거래로 판매하셔서 수목장 비용에 보태 쓰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대부분 헌 옷이라 큰돈은 되지 않을 것 같아요.
T님, 타지에서 제 곁에 있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곁에 두기에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당신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것 같네요. 역시 저와는 다른 삶의 결을 가지셨습니다. 행복하세요.
A야, 너를 좀 더 귀하게 대접하는 곳으로 가길 바란다. 너는 참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내 말이 잘 들리지 않는가 봐.
O님, 의도치 않게 당신을 괴롭게 만든 것 같네요. 등가교환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를 마음에서 놓으시고 편해지십시오. 쉽지는 않겠지만요.
어느 날 자연재해라도 일어난다면, 한순간에 사라질 사람들끼리 아등바등 사는 건 참 부질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오늘이, 버겁고도 기쁩니다.
저와 연을 맺었던 분들께, 안녕히 계시라는 말씀과 앞으로의 평안을 전합니다.
가끔은 저를 떠올려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