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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독촉도 멈췄다는 '정월대보름'

184. 노트_ 동쪽여행

by 조연섭

정월대보름이 다가오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설날은 가장 중요한 명절이지만, 사실 우리 조상들은 설보다 정월대보름을 더욱 성대하게 맞이했다.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15일 동안을 ‘설명절’이라 부르며 연일 축제와 의례가 이어졌고, 이 시기에는 심지어 빚 독촉조차 멈췄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한 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월대보름의 의미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으며, 세시풍속으로 이어져 오던 지역 축제조차 명맥이 끊기는 곳이 많아졌다.


삼척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기줄다리기’를 중심으로 규모 있는 정월대보름 축제를 매년 개최하며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기줄다리기는 마을 공동체가 하나 되어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며, 참여자들은 줄을 잡고 힘을 모으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유대감을 다진다. 동해시는 과거 전천에서 대형 달집 태우기와 불꽃놀이를 중심으로 한 정월대보름 행사를 진행해 왔으나 현재는 중단된 상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민들이 모여 달집에 소원을 적고 액운을 태우던 장면이 떠오르지만, 이제는 그 빛을 잃어버린 것이다. 반가운 소식도 있다. 횡성, 고성 등에서는 지역문화원 중심으로 새롭게 정월대보름을 복원하는 사례가 있어 기대가 된다.


정월대보름이 전하는 공동체의 의미

정월대보름은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축제였다. 대보름날 부럼을 깨며 건강을 기원하고, 오곡밥과 나물을 나누며 함께 풍년을 염원하던 풍습은 가족과 이웃 간의 결속을 다지는 행위였다. 쥐불놀이는 농경사회에서 해충을 퇴치하고 논밭을 비옥하게 만드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으며, 달집 태우기는 한 해의 액운을 태워버리고 새로운 기운을 맞이하는 공동체 의식이었다. 이러한 세시풍속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반영하는 문화적 자산이었다.

디자인_ 조연섭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공동체보다 개인이 우선시되고, 전통 명절은 형식적인 기념일로 축소되거나 사라져 가고 있다. 명절의 의미가 가족 단위의 간소한 행사로 바뀌면서, 마을 단위로 함께 어울리는 대보름의 공동체적 성격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문화 행사조차 단기적인 경제 논리에 의해 존폐가 결정되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면

특히 동해는 해양관광도시로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지만, 자연경관만으로는 지속적인 문화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관광산업이 장기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역 정체성을 반영한 문화 콘텐츠가 필요하다. 삼척이 기줄다리기를 통해 정월대보름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듯, 동해도 지역의 특성을 살린 대보름 축제를 복원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바다 배경의 대규모 달맞이 행사, 해양 불꽃놀이와 연계한 전통 퍼포먼스, 문화예술과 결합한 달집 태우기 같은 새로운 시도는 젊은 세대와 외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문화자산이 될 수 있다. 또한,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강화함으로써 관광객과 지역민이 함께하는 축제로 발전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통 행사가 인기가수 줄 세우기 등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월대보름은 본래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축제였고, 그 안에는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담겨 있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사라진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정월대보름, 새로운 문화운동의 출발점이 되어야

과거 조상들은 정월대보름만큼은 서로 배려하고 함께 즐기며, 심지어 빚 독촉조차 하지 않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만큼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했던 명절이었고, 이는 우리 사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중요한 정신이다.


지역이 문화도시로 성장하려면, 사람과 문화가 중심이 되는 도시로 변화해야 한다. 정월대보름을 계기로 지역의 역사적 자산을 재조명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사라진 달집의 불꽃을 다시 피우고, 보름달 아래서 공동체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축제의 장을 열어야 할 때다.


문화가 사라진 도시는 영혼 없는 공간에 불과하다. 정월대보름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찾고, 그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월대보름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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