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만학일기

문화기획자에게 ‘지역’이란 기억이며, 기억은 사람!

62. 만학일기

by 조연섭

문화기획자에게 ‘지역’이란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과 닿아 있다. 서울이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문화 생태계 속에서, 나는 왜 '동해'라는 바닷가 마을언덕과 골목에 남아 있는가?


지난 15년간 공들인 묵호 논골담길, 바닷바람과 함께 무대가 된 실경 뮤지컬『동해의 신선, 심동로』등 기어억에 깊게 박혀있는 두 프로그램 기획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답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에서 ‘문화예술과 기업경영‘을 강의하는 이선철 교수는 " ‘지역’은 장소가 아니라 기억이며, 기억은 결국 ‘사람‘이다." 라고 했다.


마을재생은 ‘디자인’이 아니라 ‘관계’다


묵호항 뒷골목, 논골담길은 원래 낙후된 해안마을의 뒷산 골목 등대마을이다. 2010년, 생활문화를 전승하기 위해 시작된 마을재생사업으로 처음 기획이 시작될 때, 그곳은 희미한 조명과 비어버린 집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한 칸, 한 칸을 들여다보니 그 안엔 시간이 쌓여 있는 말들이 있었다. 덕장을 운영하던 할머니, 정어리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던 아주머니, 무연탄을 이고 들고 걷던 아이들, 바다를 보고 우유를 배달하던 젊은 해녀의 남편… 그런 이야기들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논골담길로 부르는 이 마을의 재생은 ‘색을 칠하는’ 일이 아니라, 기억을 꺼내는 일이었다.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 벽이 아니라 삶, ‘재생’이 아니라 ‘되살림’이었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화려한 디자인이 아니라, 거버넌스였다. 행정과 주민, 예술가와 활동가, 관광객과 생활인구가 만나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설계하는 것. 매년 주민들과 함께 만든 골목 축제, 가가호호 삶 흔적을 기록한 마을 인터뷰, 그리고 다시 돌아온 청년 예술가들. 이 모든 것이 논골담길을 장소에서 지역으로, 공간에서 복제할 수 없는 공동체로 전환시켰다.


실경(實景) 뮤지컬, 장소가 무대가 될 때


『동해의 신선, 심동로』는 동해 추암의 또 다른 기억이자 가능성이었다. 가까운 장소는 아니지만 나는 바다를 보며 자랐고, 늘 궁금했다. 이 바다에선 어떤 이야기가 피어났을까? 동해 추암에 정자를 짓고 글을 쓴 신선 심동로의 전설과 그가 펼친 글과 삶을 바탕으로, 우리는 바다와 치마폭 같은 바위, 별이 내리는 하늘을 무대로 삼아 실경 뮤지컬을 올렸다.

심동로 뮤지컬, 사진_ 동해문화원DB

심동로는 바다의 길을 따라 자유와 진리를 좇던 사람. 우리는 그 정신을 빛과 음향, 대사와 노래로 되살렸다. 무대는 자연이었다. 객석은 해변 모래밭과 데크, 하늘이었다. 이곳이 바로 실경이자 실감이었다.

뮤지컬이 올려진 시간 그것은 장소에 깃든 기억을 다시 사람들에게 건네는 의식이었다. 마치 제례가 조상의 삶을 되새기듯, 뮤지컬은 지역의 정신을 지금 여기에 불러내는 방식이었다. 동해는 다시 ‘지역’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과 조우했다.


문화기획자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문화기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결을 세심히 짜는 일이다. 급한 성과나 숫자의 논리가 아닌, 관계의 밀도를 높이고 기억의 깊이를 더하는 일. 그래서 시골의 문화기획은 도시보다 더 섬세하고 느리다. 그 느림은 깊음으로 가는 속도다.


나는 주민의 목소리에서 배우고, 아이의 눈빛에서 희망을 읽는다. 예산과 행정 사이를 조율하며, 예술과 삶 사이를 연결한다. 때로는 사라진 골목의 이름을 되찾고, 때로는 오래된 항구의 소리를 기록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쌓여, 지역은 다시 ‘살아 있는 장소’가 된다.


‘지역’이란 무엇인가.

문화기획자에게 그것은 지워져 가는 기억을 부르는 일, 그리고 다시 관계 맺는 시간을 설계하는 일이다.

장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완성되는 것, 나는 그 완성을 위해 오늘도 한 걸음, 언덕을 오른다.

묵호의 골목처럼, 추암 해변의 물결처럼, 천천히. 그러나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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