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아카이브_ 동해
동해, 바다가 반기는 유일한 KTX 열차 여행에서 만나는 동해역 앞 한켠.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주하는 ‘책방 달토끼’ 안쪽에는, 기이한 전시장이 하나 있다. 따로 제작된 인테리어가 아니다. 세월을 품은, 누군가의 생을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본 가구… 바로 어머니가 쓰시던 자개장롱이다. 장롱의 깊숙한 품은 이제 책과 책 이야기를 품는다. 수십 년간 이불과 한복을 지켰던 공간이, 이제는 독서와 번역 그림책, 문화예술 전시의 중심이 되었다.
딸은 장롱을 버리지 않았다.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책방의 전시 공간으로 살려냈다. 서가가 되었고, 작은 독서방이 되었으며, 방문객과 책을 연결해 주는 이야기 방이 되었다. 전기선을 길게 끌어 전등을 달고, 쿠션을 비치했다. 편지와 스티커, 그림책 몇 권, 그리고 벽에는 편지처럼 따스한 이야기들이 붙었다. 누군가는 “그냥 장롱인데요?” 하겠지만, 눈여겨본 이는 안다.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세대, 기억과 정성이 얼마나 소중한 자원인지.
이 장롱은 이제 달토끼의 문화적 전환의 상징이다. 가족의 기억이 지역의 문화로 재해석되는 순간, 한 가정의 사물이 공동체의 전시물로 살아나는 이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문화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누군가에겐 낡고 버려야 할 장롱일지 모르지만, 어떤 이는 그 안에서 시대를 이끄는 감각을 본다. 문화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 가까이에 있고, 손끝에서 시작되며, 이야기로 전해진다.
책방 ‘달토끼’가 보여주는 이 장롱 프로젝트는 단순한 공간활용을 넘어선다. 지역이 품은 사물과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다시 마을과 여행자에게 돌려주는 회복의 문화 실천이다. 무심코 지나치는 역 앞 거리에서, 오랜 가족의 시간이 어떻게 문화로 바뀌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장소는 지금, 동해시가 지켜야 할 가장 아름다운 문화유산일지 모른다.
어머니가 남긴 장롱, 딸이 잇는 문화,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 이 세 주체가 만나는 이 작은 책방은 말없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문화는, 결국 돌봄이다.”
책방 달토끼 내부 사진_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