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훈 해봄
바다 바람이 새벽을 흔들었다. 그날 아침, 조용한 문화원 사무실에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멀리 창원에서 보내온 이 편지는, 50년이 넘도록 한 사람의 삶을 이끌어온 ‘기억의 바람’ 제자의 편지였다.
손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일심중학교 9기(1978) 졸업생, 이정옥 제자다. 편지 대상은 현재 해군 제1함대 사령부에서 생사를 확인 중인, 그 이름 앞에 여전히 ‘선생님’으로 남은 해군 중사 권세춘이 었다.
“선생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편지는 그렇게 시작됐다. 흰 종이 위에 또박또박 써 내려간 문장마다, 바닷바람처럼 짠하고, 햇살처럼 따뜻했다. 그 시절, 군복 입은 젊은 사병 하나가 묵호경비사령부 막사 앞 작은 언덕마을 본인 집에서 야학으로 바닷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먹을 것, 입을 것 하나 부족했던 그때, 아이들에게 펜을 쥐여주고 꿈을 심어준 사병 권세춘. 이름도 없던 그 작은 학교는 ‘일심학교’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제는 지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육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저희가 누구이기에 이토록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까?”
편지는 다그치지 않았다. 다만 한없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깊이 묻는다. 길을 잃었을 때 손을 내밀어주고, 가난이 부끄럽지 않도록 품어준 스승에게, 제자가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냐고.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계시냐고 묻는다.
우리가 말하는 ‘위대한 교육자’란, 대개 칠판 앞에서 박사학위를 들고 서 있는 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권 중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사병 신분이었다. 낮에는 나라를 위해 군대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 교과서보다 먼저 가르친 것은 ‘살아가는 법’이었다. “훌륭한 사람은 못 되어도,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겠습니다”라는 편지 속 제자의 생각은, 그가 어떤 교사였는지를 압축해 보여준다.
제자의 편지는, 단지 한 사람의 사연이 아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던 이름이, 다시 오늘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군가의 권세춘이 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돌려준 적 있습니까?”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 가는 권세춘들이 있다. 표창장 한 장 없이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낸 교사들, 그저 책임감 하나로 청춘을 헌신한 사람들. 제자 이정옥이 보내온 첫 편지는 그런 이들에게 보내는 ‘되돌아보는 편지’이기도 하다.
오는 6월 21일 바다 건너 동해 어달항에서는 ‘2025 어달항 북페스타’가 글 풍년, 편지 풍년 행사가 열린다. 첫 시작을 알리는 프로그램으로 이 편지가 낭독될 예정이다. 일심학교의 이야기가, 그리고 권세춘 중사의 헌신이 다시 들려진다. 한 사람의 선의가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증거, 그 시작은 언제나 '편지' 한 통으로 충분하다.
50년 만에 편지를 쓴 제자는 26일 필자와의 통신 인터뷰에서 “흐르는 세월 속에는 잊힌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운 것 아쉬운 것도 있습니다. 묵호 일심학교도 세월 속에 아쉽게 잊혀 있었으나 이렇게 다시 꺼내어 닦아서 그 희생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 주신 동해문화원 관계자 여러분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라고 했다.
편지를 다 읽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 얼굴 모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겹쳐온다.
“얘들아, 글씨는 마음으로 써야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