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만학일기
연구윤리는 학문 활동에서 피할 수 없는 전제다. 논문 표절을 막기 위한 규정도 중요하지만 연구자가 어떤 태도로 세상과 마주 하는가를 가늠하는 척도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의 강윤주 교수는 최근 질적연구 '연구윤리' 강의에서 연구윤리가 “연구자의 거울”임을 강조했다.
질적연구는 사람의 삶과 목소리를 직접 다룬다. 따라서 연구자는 언제나 정보제공자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동의 철회권, 사생활 보호, 트라우마 재현의 거부권 등은 모두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연구자는 지식 생산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인간을 존중하는 윤리적 주체여야 한다.
강의는 연구자가 흔히 마주하는 유혹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연구 목적에 맞지 않는 답변이 나왔을 때 이를 왜곡하고 싶은 충동, 논문을 빨리 완성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 혹은 자기 표절을 합리화하는 태도 등이다. 그러나 순간의 편의가 미래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연구자는 두려움과 긴장을 내면화해야 한다. 결국 연구윤리는 연구자를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는 안전망이다.
역사적 사례는 연구윤리가 무너졌을 때의 결과를 보여준다.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 일본군 731부대, 미국의 투스키기 매독 실험, 한국의 황우석 사건과 가습기 살균제 조작 사건은 지식이 권력과 결탁할 때 얼마나 쉽게 폭력이 되는지를 증언한다. 연구윤리는 개인의 양심을 뛰어넘는 사회 전체의 신뢰를 지탱하는 장치다.
교수는 연구윤리를 고정된 규정이 아니라 상황마다 새롭게 성찰해야 하는 과제로 제시했다. 질적연구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연구자의 태도와 자율적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보제공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연구자가 가진 권력의 무게를 자각하고 절제하는 실천이다.
연구윤리는 연구 대상을 보호하는 동시에 연구자 자신을 보호한다. 순간의 작은 이익을 위해 규정을 어겼을 때, 그 대가는 연구자의 학문적 생애 전체로 돌아온다. 윤리는 제도적 강제 이전에 연구자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자기 통제의 장치여야 한다.
따라서 연구자의 길은 윤리의 길이다. 연구윤리를 내면화하지 못한 학문은 스스로 무너진다. 반대로 윤리적 성찰을 품은 연구만이 공공성과 신뢰를 얻는다.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약속은 바로 이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이다. 연구윤리야말로 학문을 인간 존엄의 편에 세우는 최후의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