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만학일기
모처럼 가을에 떠난 4일간의 긴 여름휴가다. 때늦은 여름휴가는 취미생활과 학교일로 보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취미는 문화기획과 행사의 진행을 돕는 MC다. 축제 키워드로 떠난 이번여행도 춘천 강원학대회 포스터 발표, 2일간의 광명농악대축제 진행, 대학원 신입생 환영회 참석 등 총 4일이다. 20일 광명 제17회 전국 청소년 농악경연대회 첫날 일정을 마치고 신입생 환영회와 보도지침 낭독극이 같이 열리는 회기동 학교로 달렸다.
생각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장소는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네오르네상스관 강당, 황선영 조교는 “원우 회장님 빨리 오셨네요. 어서 오세요. 다행입니다. 아직 공연 진행 중이에요” 반갑게 객석으로 안내했다. 무르익은 배우들의 힘찬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대 낭독극 보도지침을 보는 순간, 나는 오래전 신문 지면 앞에서 느꼈던 긴장감을 떠올렸다. 활자 하나, 문장 하나에 시대의 공기가 스며들던 순간들. 대학원 강당이 아닌 공연장 한복판의 그 기억들은 낯설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무대 위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는 일반 낭독과 다른 느낌, 그것은 억눌린 시대가 남긴 상처의 기록이었다. 신문은 오늘을 기록해야 하지만, 때로는 기록하지 못한 오늘이 더 큰 진실을 말한다. 연극의 시작이라고 보는 낭독극, 바로 그 ‘침묵의 기록’을 무대 위에 펼쳐 놓았다.
“웃는 얼굴로 실어라, 찡그린 얼굴로 실어라.”
대사의 반복은 우스꽝스럽게 들리다가도 곧 무거운 현실을 드러낸다. 언론의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이 왜곡되고, 독자의 알 권리가 침묵으로 대체된 시대. 낭독극은 그 침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다시 묻는다.
나는 과거도 지금도 기사를 쓰는 자리에서 ‘무엇을 쓸 수 있고 무엇을 쓸 수 없는가’를 체감하고 있다. 그 경험은 나를 기자라기보다 ‘검열의 동반자’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낭독극 속 독백이 “나의 말에 취해 저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고 묻는 순간, 그것은 곧 나의 고백이 되었다.
무대는 법정이자 광장이었고, 동시에 나의 책상이었다. 경희사이버대 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강윤주 지도교수, 원우회를 같이 꾸려가는 하형래 부회장,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윤성진 축제 감독 등 배우들이 쏟아낸 목소리는 단지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와 우리에게 다시 묻는 질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쓰고 있고, 무엇을 지우고 있는가.
낭독극 보도지침은 신입생 환영회라는 따뜻하고 소박한 자리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 여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은 대학이 단지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기억과 책임을 나누는 공동체임을 일깨우는 시간이 되었다.
막 달려온 나를 기다려 준 듯 낭독극은 생각보다 길게 진행되는 감사함으로 후반부 50% 정도 실감했다. 극이 끝나고 객석 토론회가 이어졌다. 객석에 함께한 KHCU 문화예술경영학과 전한호 학과장은 ”전공에서 배운 학습을 잘 활용해 준 사회적 예술의 사례다. “라고 했다. 밝은 모습으로 끝까지 함께한 이원재 교수도 “낭독극 찐 팬입니다. 강윤주 교수님 낭독극 자주 봅니다. 성장하는 모습, 열정 최고입니다. 특히 대학원 원우회 하형래 부회장의 연기는 가히 천재급이다.” 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이번 학교행사를 위해 도움을 준 몇 분이 기억난다. 각종 학교행사와 프로그램 기획력 등 강윤주 지도교수님 열정, 꽃 한 송이도 가치를 담는 넉넉한 여유의 황선영 조교님, 프랑스 초청(샤먼, shaman) 공연을 앞두고 있는 김영희(원우회 총무) 원우님, 꽃다발, 선물꾸러미 준비 등 회장을 챙기는 화려한 무대 뒤 활동과 분주한 일정 감동이었다.
나는 원우 대표로서, 그리고 기사 생산자로서 이 무대를 통해 다시 다짐한다. 언론은 지침처럼 날아온 기사를 작성하는 기계적인 직업이 아니라, 시대의 책임을 기록하는 일이다. 침묵이 기록을 대신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역사를 지워버리는 공범이 된다. 낭독극은 그 공범의 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질문하라고, 기억의 편에 서라고 우리를 부른다.
보도지침 이모저모, 사진_ 조연섭, 김영희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