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만학일기
“지역은 땅이 아니라 관계다.” 최근 모 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로컬리티와 문화예술정책’ 온라인 세미나 선행논문 분석 결과가가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 내용은 우리가 지역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되묻는다. 지역을 행정구역으로만 규정하는 관습적 시각에서 벗어나, 관계와 생활세계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멘토를 담당한 이0재 담당교수와 현장 대학원생 모두가 한 목소리로 강조한 키워드는 바로 복제 힘든 ‘로컬리티‘였다.
한국 사회에서 지역은 오랫동안 ‘수도권이 아닌 곳’이라는 소극적 정의에 머물렀다. 그러나 생활권과 문화권은 행정 경계와 다르게 작동한다. 고창은 전라북도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광주와 가깝고, 성북구 도서관을 이용하는 이는 강북구 주민이 많다. 제주 역시 한라산을 경계로 네 권역이 뚜렷하다. 삶의 흐름은 선으로 그어진 행정지도와 달리, 관계와 경험의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다.
세미나에 참여한 원생들이 우려한 것은 지역의 상품화였다. 관광객 수, 매출액 같은 수치에 매달리다 보면 오히려 지역다움은 사라진다. 실제로 한 전통 축제는 수십만 명이 몰려들자 교통과 안전이 마비돼 오히려 실패로 기록됐다. 반면 소규모 주민 행사라도 ‘관계와 기억’을 지켜낸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역정책의 성공이라는 점이 강조됐다.
이 지점에서 문화커먼즈가 대안으로 거론됐다. 문화커먼즈는 지역을 공동의 자원으로 보고, 시민력·공통감각·거버넌스를 통해 유지하는 구조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여전히 가시밭길이다. 짧게는 3년짜리 공모사업, 정치권 교체로 인한 정책 단절, 주민 참여의 불안정성 등으로 인해 좋은 성과가 쉽게 사라진다. “결국 건물이나 축제가 아니라, 지역을 연결하는 사람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은 이유다. 마을 디렉터, 주민 활동가, 청년 기획자 같은 존재가 지속성의 진정한 자원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핵심은 지속 가능성의 오해였다. 단순히 사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탱 가능한 힘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럽의 도시재생은 한 세대, 20년을 내다본다. 런던 킹스크로스 사례처럼 “오늘 태어난 아이가 성인이 될 때,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반면 한국의 지역정책은 여전히 시장 임기 3년 안에 성과를 내야 하는 구조에 갇혀 있다. 그 결과 주민 참여는 형식에 그치고, 공모사업은 종료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결국 로컬리티를 지탱하는 힘은 숫자가 아니다.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 그것을 이어가려는 시민적 상상력이다. 행정구역의 선을 넘어선 생활권, 성장주의 압박을 넘어선 시간 정책, 무엇보다도 주민이 주체가 되는 커먼즈적 실천이 필요하다. 지역은 ‘몇 명이 다녀갔는가’로 평가되는 곳이 아니라, 삶이 지속되는 터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