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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Jun 27. 2023

외출준비, 80년 용산정미소

24. 브런치스토리 매거진 동쪽여행

용산정미소의 외출준비!

강원도 동해 쇄운리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최근까지 80여 년을 생업과 경제활동을 함께해 온 용산정미소가 최근 새 옷을 입고 외출을 준비 중이다.

정미소 내부에 남겨진 메모와 전화번호 국번 017,018만 봐도 대충 정미소의 역사는 가늠할 수 있다. 이 정미소는 동해학기록센터 주관으로 지난 4월 용산서원에서 개최된 북삼동 마을축제 '효행제' 기간에 시설을 공개해 가족단위 시민들에게 관심을 끌었던 근대 건축물이다.

동해시 쇄운동의 용산정미소는 마지막 근대 농업유산으로 볼 수 있다. 위치는 이세필이 세운 ‘용산서원‘바로 옆(동해시 쇄운동 200-1)에 자리하고 있다. 1940년대 삼화철산이 들어서던 시기에 김형욱 씨에 의해 설립된 정미소로 당시 지역의 지리적 배경과 농경문화를 잘 보여주는 공간으로 최근까지 운영된 시설이라 대부분 원형이 잘 보존 돼 있다. 1979년 김동순(남, 1937년생)씨가 인수해 운영하다가 지금은 돌아가시고 아들인 김석현(남, 62)씨가  최근까지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산정미소의 역사 문화적 가치에 문화를 입혀 외출준비를 총괄하는 활동가가 있다. 바로 동해학기록센터 홍협 연구원이다. 연구원은 얼마 전 6.25일 KBS를 통해 동해지역에서 발견된 6.25 관련된 음악악보와 자료를 활용 방송특집을 마련하는 등 역사적 기록을 재조명하는데 앞장서는 분이다.

정미소는 1년 내내 풍요가 넘치는 곳이다. 벼를 수확하는 가을은 물론 봄, 여름, 겨울에도 가을을 느끼게 한다. 노란 벼가 현미를 거쳐 하얀 쌀로 탈바꿈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저절로 배가 불러온다. 정미소는 과거 가난한 시골에선 부의 상징이었다. 시골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공장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농촌에선 정미소와 양조장(술도가), 과수원집주인을 3대 부자로 꼽았다. 술도가는 주류제조 면허가 있어야 했기에 돈만 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었다. 사과와 배 등 과수원은 재배기술이 까다롭다. 농사를 오래 했더라도 웬만큼 배우지 않은 사람은 도전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정미소는 전국적으로 한때 2만 개나 됐다고 한다. 용산정미소는 최근까지 운영하던 주인의 손때가 묻은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동해의 역사가 서려 있는 소중한 근대 건축물이다. 지붕과 천장이 갈수록 노후화돼 이번 2층 형태의 정미소 건물 환경정비와 외벽 보수 작업을 모두 마치고 본격적인 외출 프로그램(사진갤러리, 이야기를 팝니다. 정미소 소풍 등) 운영을 통해 정미소 역사와 문화를 알릴 계획이다.

용산정미소 공간재생, 동해학기록센터 <홍협 연구원> 인터뷰 내용입니다.

Q_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동해문화원 소속 동해학기록센터 연구원으로 활동중이며 특히 근대산업의 시작인 동해시의 근 현대사 기록에 관심이 많은 홍협 연구원입니다.

Q_한국 정미소와 용산정미소의 역사가 궁금해요

우리의 주식인 곡식을 생산하여 먹을 수 있는 쌀과, 보리쌀을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에는 방아를 찧어 왔었는데 가정에서는 연자방아, 디딜방아등 사용하였고, 수력을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정미를 하였다. 일제강점기 들어와 기름을 사용하는 발동기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근대적인 정미소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이 지역은 삼척군에서 가장 넓은 들판을 가진 북삼면에서 생산되는 쌀, 잡곡등을 도정하기 위하여 북삼면에는 많은 곳에 정미소가 설립되었는데, 각 마을마다 2-3개소 될 정도로 많은 곳에 정미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미소도 문명의 발달에 따라 최신 시설을 갖춘 대규모 도정공 장인 RPC(미곡종합처리장)가 설립되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그래도 70-90년대 한때는 떡방앗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 시대에 명절은 송편을 빚기 위해 쌀을 가루를 내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때가 마지막 호황기라고 할 수 있었다.

용산정미소는 일제강점기에 북삼동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곳으로 최초 설립일은 알 수 없으나 이후 김형욱 씨에 의해 운영되다가 1979년 김동순(1937년생)씨가 운영하다가 돌아가신 후 아들인 김석현(62세)이 최근까지 운영하고 있었는데 다른 정미소와 달리 축과 피대등 동력 전달 수단, 잡곡정미기등 50-60년대의 모습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보기 드문 정미소로 미래의 농업 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닌 곳이다.

Q_지금 보수작업 중이신데 무슨 일인가?

지난 3월 강릉 산불을 발생시켰던 강풍은 동해에도 큰 피해를 가져왔는데 용산 정미소도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건물의 벽이 일부 무너져 앞으로 올 장마로 인하여 원형이 훼손될 위기에 처하여 이번에 긴급 응급 복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Q_용산정미소의 문화적 가치는?

우리 주변에는 과거의 정미소라고 볼 수 있는 물레방아도 하나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급격한 문명의 발전과 산업화 도시화 속에 과거의 우리 필수 생활의 유산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정미소도 예외는 아니다. 동해에서도 수십 군데 정미소가 모두 사라졌다.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전국에서도 많지 않으며 동해시에서는 용산정미소가 유일하다. 의식주의 기본인 주식을 정미하는 것은 수천 년 이어온 우리의 문화이며 전통이다. 이제 근대사에 설립된 정미소마저 모두 사라지기 전 보존과 정비를 통하여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의 생활 문화를 남겨주는 것이 우리 세대의 책임 있는 역할일 것이다.

Q_앞으로 활용계획은?

용산정미소는 추후 지역의 근대 농업유산의 하나로서 좀 더 다양한 농업 전시물을 함께 전시하여 어린아이들, 학생들의 교육 및 체험의 장, 중년 이후 세대들의 추억의 장소, 그리고 나아가서 관광상품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 지역 주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실정이다.

정미소 내•외부 사진_ 조연섭
실내모습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들
018 전화번호가 인상적이다.
017로 시작하는 번호도 있다
벽면 보수중
벽면 보수
내부 모습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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