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논골담길 커먼즈
논골담길 커먼즈 1층에는 아침 7시면 불을 밝히는 이쁜 편의점 하나가 있다.
간판에는 '이마트24'라고 적혀 있지만, 내게는 고향같고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다.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가게다. 어머니와 아버님, 그리고 30대 초반의 아들이 함께 지키고 있다.
엄마는 아침 7시 동네에서 가장 일찍 문을 연다. 엄마는 찻집 리솔티드를 운영하고
아들은 10시쯤 출근해 마감까지 마트를 총괄 운영 한다.
8일 휴일 오후 퇴근길, 차에 넣을 자동차 워셔액이 필요해 편의점에 문의했다.
혹시 워셔액이 있느냐고 물으니, 젊은 아들과 여 사장님은 동시에 말했다.
“있기는 한데요… 여기 편의점에서는 좀 비싸요.
다이소 같은 데 가시면 더 싸게 살 수 있어요.”
순간 나는 조금 놀랐다.
물건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 굳이 “다른 데 가면 더 싸다”고 말하는 장면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은 무엇이든 더 팔기 위해 애쓰는 시대다.
그런데 이 젊은 마트 사장은 오히려 위층에서 얼마전 가족같이 함께 둥지를 튼 삼촌같은 나에게 더 싼 곳을 알려준다.
그래도 이미 사려고 마음먹었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살게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앞에서 워셔액을 넣으려는데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손으로 몇 번 돌려봐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편의점의 그 젊은 아들 사장이었다.
“제가 열어드릴게요.”
그는 건너편 편의점에서 나와 주차장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뚜껑을 단숨에 따 주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워셔액 입구를 보더니 고무 바킹이 망가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이거 새로 갈아야 하는데요.”
얼마전 인터넷으로 구입하긴 했는데 대체 방법을 몰라 이렇게 올려놓고 다닙니다. 했더니
잠시 뒤 그는 편의점으로 돌아가 니퍼를 하나 들고 다시 왔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고무 바킹을 제거하고 교체해 주었다.
워셔액까지 직접 넣어주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게로 돌아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생각해보면 오늘 내가 산 것은 워셔액 한 통이지만
사실은 친절과 성실이라는 오래된 기술을 만난 셈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를 향해 어른들은 쉽게 말한다.
“요즘 애들은…”
하지만 그 말은 종종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들의 습관 같은 말이기도 하다.
편의점 앞 작은 주차장에서 나는 그 말을 잠시 내려놓았다.
물건을 팔기보다 손님에게 더 싼 곳을 알려주고, 자기 가게 일이 아닌데도 니퍼를 들고 주차장까지 뛰어오는 젊은이.
그 모습이 어딘가 오래된 TV 드라마 속 인물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별명을 하나 지어 주었다.
“오늘부터 당신은 묵호를 지키는 리솔티드 맥가이버입니다.”
그가 일하는 마트는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찻집이 연결되어 있다.
오징어 먹물 아이스크림으로 줄서는 묵호의 핫플 '리솔티드'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다.
맥가이버처럼 무엇이든 해결해 주는 청년.
리솔티드의 맥가이버.
논골담길 커먼즈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 청년은 언젠가 동네의 작은 전설이 될지도 모른다.
세상은 거대한 이야기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 날 편의점에서 누군가의 워셔액 뚜껑을 열어주는
그 작은 손길이 도시의 온도를 조금 높인다.
오늘 나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이제 이렇게 불린다.
묵호를 지키는 리솔티드 맥가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