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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ug 19. 2023

글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

76. 브런치스토리 매거진 글 소풍

글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

글, 그냥 편안하게 써보는 것이다. 화려함에는 못 미치더라도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이 나를 자신 있게 만든 원동력이다. 글쓰기 근육 높낮이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공해 없는 공간에서 멋진 음악 “인생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와 같다. “는 캔사스의 <Dust in the wind>를 들으면서 해양심층수 버금가는 맑고 고운 느낌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유년시절부터 가족이 듣던 야외전축을 보면서 늘 음악을 가까이했다. 그 추억은 꿈이 됐고 그 결과 진학을 하면서 하라는 공부는 팽개치고 대학생이라 속이고 고교시절부터 음악다방에 출입했던 불량학생이었다. 당시 음악다방 분위기는 대학교 주변은 대학생, 공단 근방은 근로자 등이 많았지만 일부 외각업소들은 고등학생들이 가끔 출입하기도 했다. 미성년자 단속에 걸려 영업 정지 업소도 꽤 있었다.

음악다방 추억

당시 FM이 없던 시절 어디든 도심 중심 거리는 음악다방에서 내다 걸어놓은 스피커로 멋진 DJ 목소리와 주옥같은 팝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유일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소는 음악다방, 음악감상실이 전부였다. 요즘은 방송에 홍보하지만 당시는 DJ에게 바로 홍보음반을 보냈다. 또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담긴 LP는 밥은 굶어도 구입하고 속지로 음악공부를 하면서 음반을 모아 약 4천 장에 가까운 LP를 모으기도 했다. 앨범 표지에 예명의 이름도장을 찍어 음반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 앨범은 모 업소 부도로 함께 경매에 넘어가고 얼마 남지는 못했지만 돌이켜 보면 참 아름다운 추억이 됐다. 핑크 플로이드, 킹크림슨, 무디블루스, 제네시스, 제트로 툴, 러시, 예스, 프로콜 할럼, 뉴트롤즈, 르네상스 등 프로그레시브 락과 팝음악을 워낙 좋아해서 1982년부터 음악다방 DJ생활을 시작한 해적음반 일명 <백판>의 마지막 세대다.

1985_포항 예나르 음악다방

1980년대 전 후반은 하루에 음악다방 3~4곳을 다니며 엄격한 선배들에게 노래를 배우고 소개하는 직업이 본업이었다. 청바지와 통기타가 유행하던 시절 뮤직박스 앞에서 DJ의 뒤를 바라보면 남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의 장발머리, 물론 유행이었겠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FM 탄생

그렇게 세월이 흘러 90년대 FM이 생기면서 음악다방들은 큰 변화가 일어난다. 물론 경력자들과 지역에 방송사가 있는 지역의 DJ들은 대부분 당시 FM라디오 음악방송으로 자리를 옮기에 된다. 필자의 선배 경우도 아련하게 기억난다. 신경일, 진용진 선배가 포항 MBC•안동 MBC에 각각 입사했던 기억이 난다. 필자는 포항 MBC_ FM 개국 시절 포항 우체국 앞 <예나르 음악다방>에 근무할 시절이다. 영일만 친구 최백호, 부산대학교 그룹 썰물의 김성근, 가수 김상진 등이 종종 방문하던 곳이다. 당시 음악다방 대표는 부산 MBC 아나운서 출신이었으며 이후 그 시절 동방생명인가 보험사업을 시작해 전국 여왕상을 수상해 세계 최고의 생명보험 및 재무서비스 전문가들로 구성된 글로벌 독립 협회 MDRT(백만 달러 원탁회의)까지 초청받은 걸로 기억한다. 딸도 대구 MBC 아나운서로 취직했다. 대표 부군은 그 시절 포항 MBC 편성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필자는 추천을 받고 아마추어 대학생 DJ로 방송국 스튜디오에 첫 출연했던 추억도 있다. 그렇게 포항 우체국 앞 예나르, 육거리 황제, 죽도시장 비원다방, 구미 밀타운 레스토랑 등에서 활동을 하다가 지인 추천으로 잠시 음악을 중단하고 대학 첫 전공인 무역학을 써먹는 직장 취업으로 서울로 간다.

첫 직장은 여의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금산빌딩에 있던 모 무역회사에서 잠시 근무를 했다. 지하철 노선도 부족할 시기다. 출근시간이 두 시간 정도였고 당시 기억으로 서울사람은 발걸음이 빠르고 참 부지런했다는 기억이 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90년 초 고향 삼척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지역사회도 많지는 않았지만 강릉•동해•삼척도 몇 개의 음악다방이 있어 낮에는 직장 밤은 여전히 방송일을 이어갔다. 우연한 기회에 숙모가 다니던 화실에 방송 PD와 인연으로 어쩌다 지역방송 FM객원 DJ를 시작하게 된다. 방송에서 가장 기억나는 일은 지역 언더그라운드 통기타 가수들 출연과 함께 도움 준 PD, DJ, 아나운서 들과의 격 없이 보낸 짧은 시간들이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단체사진
고 김광한 DJ 선배와 묵호 논골담길에서
이양일 팝컬럼니스트, DJ한용진 전 회장과
케이블 TV 개국 시작

이때 국내 방송계는 큰 변화가 생긴다. 상업방송 케이블 TV 탄생이다. 전국에서 기존 잘 나가던 중계유선방송, 기업등이 앞 다퉈 방송국(SO), 프로그램공급업자(PP)를 설립하게 된다. 필자도 당시 지인이 지역 중계유선방송 대표로 있었고 케이블방송 설립위원회를 만들고 제의가 들어와 케이블 TV 설립을 추진하던 동해유선방송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96년쯤으로 기억한다. 스튜디오도 스스로 만들고 유선방송이었지만 규모가 커 지역뉴스와 축제 생중계, 문화사업단 등을 운영하며 약 10년간의 세월이 흘렀다. 욕심 많은 대표 고집으로 결국 케이블 TV 설립은 큰 부도와 함께 무산됐다. 약 20년 전 일이다. 부도 규모는 130억 정도로 알고 있다.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필자도 대표가 지인인데 하고 장비 보증을 섰다가 몇억의 부도를 맞았다. 상상도 못 한 시련이 닥쳐온다. 회사를 그만두고 우유배달부터 건물청소 등 7년간 4가지 직업으로 부도를 극복했다. 어려운 시절이 이어지던 시기 2004년 동해문화원 사무국장 공채 공고가 났다고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딱 자네 자리 같다며 신청하자고 추천하셨다. 지역 문화계 원로셨던 고 김영기 어르신, 지역 MBC 선배님들, 소설가 홍구보 선배, (사)한국민예총 본부 등 추천으로 총 7명이 응모한 공채에서 합격해 2004년 7월 40대 초 나이로 지역문화원 공채 보궐로 사무국장으로 임용 됐다.

지역문화원 공채 임용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2023년 7월을 넘겼으니 20년이다.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사람에게 많이 지치기도 했고 사례도 사회적 성과 봉사도 많았다. 전직 경험을 활용한 MC 활동도, 기획도, 연출도, 감독 활동도 활발했다. GTI 국제무역•투자박람회 2017-18년 2년 총감독과 MC, 평창동계올림픽 이색성화 환영행사 기획 진행, 대한민국 직장인밴드 동해콘서트 4년 기획, 연출, 진행, 제1회 송정막걸리축제 기획, 총감독 진행, 지역 대표축제 15년, 장애인의 날 10년, 자원봉사자대회, 어르신행사 등 약 20년간 수천회 행사를 봉사했다. 재미있는 성과도 있었다. 제가 거주하는 동해시 여성단체 협의회 회원분들 여성발전에 기여한 그 지역 남성 1인을 선발해 시상하는 최초 감사패와 행복봉사단이 금융권과 손잡고 시도한 친절 봉사왕 역시 지역  첫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성 발전 유공자 최초 감사패

글은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글을 쓴 이유는 앞으로 사회봉사, 문화기획도 꼭 필요한 사회적 참여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대부분 내려놓고 필자가 인생 2막에 가장하고 싶은 글쓰기에 전념하겠다는 각오를 위해서다. 글을 배운 적도 없고 기껏해야 보도자료 20년 쓴 일과 브런치스토리 작가로 매거진 발행 200건이 전부다. 필자의 글 수준에 대한 평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브런치스토리가 좋다. 일기 쓰듯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장점이 좋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고 혼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의 선택도 좋다. 글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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