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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Nov 13. 2023

임진왜란의 숨은 장수, 홍견

4. 동해문화원 매거진 노을포럼

홍견 장군 일생 기록, 도장선생유사 발견

동해문화원 소속 동해역사문화연구회 주관 11월 노을포럼이 <임진왜란의 숨은 장수, 홍견>을 주제로 지난 9일 동해문회원 1층 청운실에서 개최됐다. 이날 멘토는 동해학기록센터 홍협 연구원이 담당했다.

동해학기록센터 홍협연구원, 사진_조연섭

2022년 도장선생유사가 홍순성 전 동해문화원장 댁에서 발견됐다. 도장선생유사는 임진왜란의 숨은 장수 홍견 장군 일생을 기록한 기록서다. 홍견은 1572년 별시무과에 합격하고 난중일기에 17차례 등장하기도 했던 역사 인물이다. 도장선생유사에 의하면 7월 8일 이억기 수사와 한산대첩에 참여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1957년 원균의 칠천량전투에 참가 패하여 바다에 뛰어들어 14일간 표류를 하다 본진에 귀한 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홍견 장군은 같은 남양홍 씨 후손에게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동해학기록센터 홍협 연구원은 2023년 동해문화원 11월 노을포럼 특강에서 밝혔다.

도장선생유사, 동해학기록센터 DB

홍견 장군은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맹방에서 1535년(중종 35년)에 출생했으며 1551년 명종 6년 17세에 강릉최 씨 최인의 딸과 결혼했다. 1558년(명종 13년) 24세에 무예에 전념했다는 덕봉산 자명죽의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1572년 38세 나이에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 7위 급제해 1573년 종 8품 훈련원 봉사에 임명된다. 1574년 벌등포진 권관에 임명되고 1577년 종 9품 권관에서 진급 1년 만에 종 4품 만호직에 오른다. 1580년 35세 나이에 고흥 발포진 수군만호로 지휘관을 시작했다. 1591년 57세 나이에 전라도 흥양 사도진의 방답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고 장남 <원해>는 옥포만호로서 사고로 사망한다.

1592년 1월 우수영 임치도진의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고 5월 23일 20만 대군으로 침략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7월 8일 이억기 수사와 한산대첩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1593년 8월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고 1594년 전쟁이 소강된다. 1595년 61 나이에 이순신 장군과는 난중일기에도 17차례 등장하듯  잡은 접촉을 했다. 8월 15일 난중일기에는 새벽에 망궐례를 하고 이억기와 이응표, 홍견 등 여러 장수가 찾아와 종일토록 취하고 밤잠을 못 이루고 <한산도가>를 읊펐다고 한다.

閑山島歌(한산도가)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월명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 (무대도심수시)

何處 一聲羌笛更添愁  (하처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할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끝나니

군사 매뉴얼 기록 담긴 ‘군수록’ 남겨

1598년(선조 31년) 64세 임치진에서 둘째 아들 첨해에게 유서를 쓰고 고부군수에 임명된다. 8월에 일시 귀향해 전토와 제사, 노비 등 모두 동생에게 넘기고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은 당시 54세로 전사하고 7년간의 전쟁이 끝> 나게 된다. 12월 홍견장군은 평해군수와 창성도호부 부사가 된다. 1599년 65세에 <군기 시 첨정> 겸 <우통례>와 김해도호부사로 임명되고 수군통제사 이시언의 휘하에서 통제사영 실무를 처리하고 군사상 필요한 것들을 기록한 <군수록>을 남겼다. 홍 장군은 1600년 66세에 수군 장수로 복귀해 가덕도 방어를 담당했다. 1605년 71세에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 되고 공신 위상의 근거인 <어제시>를 받기도 했다. 1608년 74세에 귀향 재산과 노비를 동생에게 주고 부모에게 효도 못하고 전쟁에서 패하여 국가에 충을 못했다며 도장산에 은거하다가 1610년 광해 2년 76세에 사망했다.

홍견에게 하사한 어제시

임진왜란의 미스터리 한 당시 최대의 함선을 보유한 이억기 전라우수영의 역할을 고찰하고 그 휘하 장수들의 잊힌 전공 특히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한산대첩의 적선 격침 기록은 총 59척으로 24척이 참가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17척, 그리고 전라우수영(이억기 함대 25척 참가)과 경상우수영(원균함대 7척 참가)이 합해서 42척을 격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는 도장선생유사에 의하면 홍견장군도 참가하였는데 한산대첩에서도 이억기, 원균 함대의 규모를 평균으로 보아도 이억기 함대는 30척 이상 적선을 격침하여 한산대첩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에 대한 전공의 기록들은 별로 없다. 그리고 임진왜란 7년간 현역 장수로서 7년간 임치진첨절제사로 한양 도성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해안선을 방어하고, 북방의 여진족을 방어하는 벌등포진 권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임진왜란 한산대첩, 기문포, 칠천량전투등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던 홍견장군의 전 생애를 고찰하였다. 

그러나 선조실록, 각종 장계를 보아도 홍견장군의 전투 기록은 기문포 전투 밖에 없다. 이것은 이억기 수사의 전투 공적을 알리는 전공에 대한 장계 부족과 명량해전 직후 왜군은 명량해전의 주 근거지였던 전라우수영을 초토화시킨 결과로 사료의 부족을 추론할 수 있다. 평생을 그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고향에 돌아온 홍견은 전토와 제사의 권리, 노비등을 모두 동생에게 넘기고 공직으로 인하여 부모에게 대한 불효, 칠천량의 패전은 국가에 불충이라고 자책하며  도장산에 은거를 하였다.   

허목의 척주지 인물란에 기록된 홍견장군은 "도장선생 유사에 의하면 1846년대 삼척부사 이규헌의 제향(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을 해마다 받았다."라고 기록됐다. 동해문화원 동해학기록센터 홍협 연구원은 11월 노을포럼 특강에서 "강원도의 임진란 참전 영웅 한백록 장군, 그리고 삼척 덕봉산과 삼락정 전설의 주인공이 아닌 임진란의 영웅으로 잊힌 홍견 장군을 다시 역사 앞에 내세울 때가 아닌가 싶다."라고 강조했다.

노을포럼, 홍협 동해학기록센터 연구원 특강, 사진_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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