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억찬•생활사 구술•눈물의 묵호항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이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은 지침에 따라 산업유산 묵호항을 장소적 배경으로 정하고, 묵호 사람 20명을 구술자로 확정했다. 10명의 시민 기록가들을 공개모집하고 선발된 기록가를 대상으로 국내 정상급 구술과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장) 컨설턴트의 엄격한 커리큘럼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서울과 대전, 동해를 오가며 지난 1년간 진행하고 기록한 대장정이다. 첫 구술자는 강경자 기록가가 기록을 담당한 전억찬 강원경제인연합회 회장이다.
• 구술자_ 전억찬 강원경제인연합회 회장
• 기록가_ 강경자(동해문화원 생활사 기록가)
• 편집•정리_ 조연섭 스토리 크리에이터
가난은 큰 사람을, 시련은 꿈꾸던 세상을!
전 회장은 1946년 동해서 태어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야간학교를 열었다. 망상야간학교, 묵호 새마을청소년학교, 성림기술고등학교, 동해자동차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하면서 전 학력 인정을 받는 학교로 발전시켰다. 도의원으로 활동하였고 동해경제인연합회를 창립하였다. 현재는 강원경제인연합회 회장과, 동해경제대학 학장으로서 지역의 발전을 위하여 힘쓰고 있다.
구술자가 기억하는 어릴 적 이야기는, 어머니 아버지가 돈 벌러 밖에 나가셨기 때문에 7남매의 한 맏이로서 늘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가정교사를 하면서 본인의 학비를 충당했다. 벌목이 죄가 되던 시절에 한밤중에 산에 가 나무를 해서 새벽에 묵호 시내까지 지고 와서 팔고 지게는 아는 가게에 맡겨놓고 등교했다는 이야기는 아이를 키워본 엄마로서 너무나 마음 아픈 대목이었다. 때로는 묵호항에 가서 오징어 똥을 주워 팔기도 하였고, 세탁소에서 아침이면 여학생들의 카라를 200개씩 다려주고 나서 등교했다고 하였다.
고교 시절 고향에서 야학 열어
고향인 망상에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동생들과 동네의 선·후배를 보고 이웃집 할머니의 사랑방을 빌려서 야학을 열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 사랑방에서 마을 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공부를 가르쳤는데 특히 여학생들이 많이 왔었다고 한다. 마을청년들이 학교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여학생이 온몸에 화상을 입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련은 전억찬 구술자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은 더욱 확고해져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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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학교를 키우기 위해 동네 어른들께 호소하니 마을이장을 하시던 정흔모씨라는 분이 땅을 빌려주셨다. 혼자서 벽돌을 찍고 마을 주민들이 기증해 주는 서까래를 기증받아 학교를 짓기 시작했고, 학교가 지어지기 전에는 아버지가 누에고치 기르던 천막을 가져와서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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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자동차공업학교가 설립되고 나서는 학생들의 실습 교육을 위하여 현대 자동차의 정몽준 회장을 찾아가서 기능올림픽에서 메달 딴 기능인이 만든 자동차를 기증받아 왔고, 정수직업훈련원에서 육영수 여사를 만나 실습 기자재를 기증받아 오기도 했다. 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3개의 자격증을 따도록 독려했고, 10개씩 자격증을 딴 학생들도 많았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자동차회사에도 많이 취직되었고, 현재 동해에서 카센터나 자동차정비소는 이 학교 졸업생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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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억찬 구술자는 도의원을 지냈으며 동해의 해결사라고 할 만큼 주민들의 오래된 숙원사업을 해결해 주었고 현재는 강원도경제인연합회 회장과 동해경제대학 학장으로서 강원도와 동해의 발전을 위하여 지금도 현재진행형임을 느낄 수 있었다.
기록가 소개와 구술후기
춘천에서 태어났다. 결혼하면서 동해, 묵호에 정착했다. 동화 작가인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지역 문학가들의 문학지인 ‘동해문학’을 창간호부터 32집까지 출간하였다.
60년대 묵호는 많은 도매상들이 찾아들었다. 국제항인 묵호항이 물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징어와 명태가 풍어를 이루어 전국의 많은 노동자들이 묵호에 가면 돈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황금기를 살아온 구술자님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는 이야기는 때로는 흥미진진했고 때로는 의아하기도 했고 때로는 마음 아파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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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에 고이 접어 두었던 어린 시절 빛바랜 이야기들을 오래된 사진첩에서 하나씩 꺼내 보듯 재미있게 혹은 가슴 아픈 추억으로 말씀하시는 표정에서는 그 시절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오신 구술자님의 인생을 단 네 시간에 함축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리였지만, 구술자분들은 자신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며 흐뭇해하셨다. 세월 가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서민들의 삶의 이야기가 아카이빙 사업으로 저장되어 먼 훗날 드라마로 태어난다면 신기하게 바라볼 몇 세대 후의 눈동자를 상상해 본다.
나가는 말
•아~~ ~ 눈물의 묵호항구 떠나갑니다
• 정든 남편 무덤 앞에 마지막 통곡하고
• 옥수수가루 죽에 고픈 배를 움켜잡는
• 어린 자식 앞 세우고 고향 찾아 떠납니다
• 아~~~ 떠나갑니다
• 아~ 눈물의 묵호항구 야속합니다
• 고기잡이 떠난 남편 그 배는 소식 없고
• 망망한 동해바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 한이 많은 가슴 안고 살 곳 찾아 떠납니다
•아~~~ 떠나갑니다.
이 노래는 국민가수 이미자가 25세 되던 해 1966년에 부른 눈물의 묵호항구 노래가사다. 박용재교수(극작가, 뮤지컬 감독, 단국대학교 대학원)는 눈물의 묵호항 구 노래를 듣고 '가난, 죽음, 이별의 바다를 건너, 살 곳 찾아 떠나야 했던 슬픈 역사'의 기록이라고 노래 감상 소감을 말씀하셨다. 이미자 선생님 공연 단골연주를 맡은 재즈 연주자 A모씨에 따르면 '눈 물의 묵호항구'는 이미자 선생님도 발표될 당시 몇 번 부르고 불러 보지 못한 귀한 곡이라고 했다.
84년부터 언더그라운드 DJ였던 필자는 약 30년 전부터 알고 있던 노래다. 하지만 2004년 문화원인 비영리 법인 제도권에 들어오고 2010년 묵호 논골담길 조성 전에는 사실 관심 밖이었다. 해양문화를 주제로 단 한 팀을 뽑는 도 공모사업에 선정 동해문화원이 지난해 추진한 강원해양문화대축전의 테마 노래로 58년 만에 후배가수 인00씨 목소리로 발표하기도 했다. 묵호 사람들의 삶과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노랫말이 다. 앳된 당시 이미자의 젊은 목소리로 '묵호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한층 더 선명하게 그려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미자 선생님이 부른 이 노래를 복제하기 힘든 묵호 사람의 삶을 재 해석하는 차원에서 묵호항이 배경인 이번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 제목으로 ‘눈물의 묵호항’을 확정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