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영규_ 눈물의 묵호항
생활사 구술사_ 눈물의 묵호항, 전영규 편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이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은 지침에 따라 산업유산 묵호항을 장소적 배경으로 정하고, 묵호 사람 20명을 구술자로 확정했다. 10명의 시민 기록가들을 공개모집하고 선발된 기록가를 대상으로 국내 정상급 구술과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장) 컨설턴트의 엄격한 커리큘럼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서울과 대전, 동해를 오가며 지난 1년간 진행하고 기록한 대장정이다. 두 번째 구술자는 역시 강경자 기록가가 기록을 담당한 전영규 동해시파크골프협회 회장이다.
구술자는 1941년생으로 동해 묵호 태생이다. 초등학교는 정선 여량에서 졸업하고 다시 묵호로 이주한다.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퇴하고 장사를 시작한다. 오징어 건조, 명태 건조, 부두에서 생선장사, 쌀장사를 하던 중 묵호읍 3대 양곡 조합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취직이 되어 정년퇴직하였다. 퇴직 후에는 많은 사람의 결혼 주례를 서주기도 할 정도로 말솜씨가 좋으셨다. 강원도 파크골프를 창립하였고, 현재는 묵호동 노인회장과 동해시 파크골프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희망을 찾아 떠났던 기억 저편의 이야기
구술자는 어머님이 평소에 늘 강조하시던 “바른 마음을 가져라, 정직해라, 바른 몸가짐을 하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평생을 생활하셨다고 한다. 묵호서 태어나 다섯 살에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가 징용을 대신해 강제노동하시던 정선 여량으로 이사 가서 살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 다녔는데 정부 시책으로 문을 닫는 바람에 서당마저 못 다니게 되자, 중학교에 가고 싶어 부모님을 설득하여 묵호로 이사를 왔다. 묵호중학교 재학 중에도 새벽이면 묵호항에 나가 오징어를 사다가 건조를 하고 겨울이면 명태를 건조하는 일을 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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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는 체육특기생으로 입학을 했기 때문에, 입학금은 면제받고 월납금 만 내고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가 묵호항에서 지게꾼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렇게만 하여서는 도저히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1학년 2학기 때 학교를 자퇴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구술자는 남에게 속고 살지 않기 위해 법전을 사놓고 틈틈이 법 공부를 하여 훗날 국민건강보험에 재직하던 시절이나, 부두에서 장사할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웃들도 법에 대해 많은 상담을 해 오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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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면 오징어 건조를 하고, 부두에서 도계, 황지, 태백에서 오는 장사꾼을 상대로 생선 장사를 하고 인근 도시 장날마다 쫓아다니며 돈 되는 장사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쌀장사를 하시도록 권유하고, 장사를 하도록 기반을 마련해 드렸다. 그러던 그에게 본보기 상이 생겼다. 작업복 입은 사람만 보던 그가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출근하던 어떤 아저씨를 보면서 나도 저분처럼 양복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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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하여 돈이 생기자, 구술자는 정선 여량에 논을 샀다. 아버지가 정선에서 농사지을 때 남의 소작농을 한 것이 너무 한이 되어 논을 사면서, 앞으로 돈만 벌면 정선의 논을 모두 사 버리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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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하여 첫 휴가를 나와 보니 어머니가 쌍둥이 동생을 낳아서 충격을 받았다. 그때도 이미 다섯 형제에 부모님까지 일곱 식구가 살기가 어려웠는데 동생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생긴 걸 보고 너무 놀랐다고 하셨다. 제대하고 돌아와서 다시 어머니에게 쌀장사를 하시도록 권유하고 싶었으나 어린 동생들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여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내에게 집안 살림과 동생들 양육을 맡기고 어머니는 쌀장사를 하시게 하고 구술자도 쌀장사와 연탄장사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러던 중 38살이 되었을 때 3대 양곡조합장에 선출되었다. 양곡조합장을 하는 중, 사단법인 영동의료보험조합 묵호지역의 관리자로 발탁되어 양곡조합장과 민간의료보험을 병행하면서 설계사를 모집하여 많은 계약자를 가입시켰다.
국민건강보험이 설립되면서 정책상 합류하여 국민건강보험에 정규직원으로 채용되었다. 15년을 근무하고 정년퇴직하였다. 강원도 파크골프를 창립하셨고, 현재 묵호동 노인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춘천에서 태어났다. 결혼하면서 동해, 묵호에 정착했다. 동화 작가인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지역 문학가들의 문학지인 ‘동해문학’을 창간호부터 32집까지 출간하였다.
60년대 묵호는 많은 도매상들이 찾아들었다. 국제항인 묵호항이 물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징어와 명태가 풍어를 이루어 전국의 많은 노동자들이 묵호에 가면 돈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황금기를 살아온 구술자님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는 이야기는 때로는 흥미진진했고 때로는 의아하기도 했고 때로는 마음 아파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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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에 고이 접어 두었던 어린 시절 빛바랜 이야기들을 오래된 사진첩에서 하나씩 꺼내 보듯 재미있게 혹은 가슴 아픈 추억으로 말씀하시는 표정에서는 그 시절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오신 구술자님의 인생을 단 네 시간에 함축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리였지만, 구술자분들은 자신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며 흐뭇해하셨다. 세월 가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서민들의 삶의 이야기가 아카이빙 사업으로 저장되어 먼 훗날 드라마로 태어난다면 신기하게 바라볼 몇 세대 후의 눈동자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