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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Feb 21. 2024

동해 천곡, '모란반개형국' 명당!

7. 매거진 노을포럼

• 망상 망운봉은 일제 왜곡 지명

• 천곡동은 모란반개형국 명당!

동해역사문화연구회 2월 노을포럼에서 '동해시 땅이름 이야기' 주제의 지명 시리즈 두 번째 강의에서 책의 저자 윤종대(동해역사문화연구회) 회장은 망상동 유래를 설명하면서 망상의 망월봉이 1918년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조선지형도’에서는 일본식 창지개명시 ‘망운산’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며 이는 고유 우리 땅이름을 왜곡한 지명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동해의 수부동 천곡동 유래 소개에서 천곡은 ‘샘실’ 한자지명을 훈차한 지명이며 ‘모란반개형국‘ 명당이라고 했다.

• 노을포럼?
동해문화원 소속 동해역사문화연구회가 매월 9일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도시 동해시에서 노을이 시작되는 시간 오후 5시에 시작한다고 해서 필자가 포럼명을 <노을포럼>으로 하기로 하고 윤종대 회장 및 회원들의 찬성 의견을 반영해 확정함
2월 노을포럼, 사진_조연섭

망상(望祥)의 의미는 상서로운 기운을 바라는 뜻을 담고 있으므로 좋은 이름과 좋은 형국에서 좋은 기운이 일어난다고 믿었던 풍수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붙여진 땅 이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조 3년(1457)에 이미 강릉대도호부에 우계현과 망상면을 설치하였고, 인조 26년(1648)에는 다시 망상리로 표기하였다. 숙종 31년(1705)에 망상면으로 확정되고 면사무소는 심곡동 댓말(죽전)에 두었으며, 1757년부터 1765년 사이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망상면은 망상리, 만우리, 대진리를 관할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0년경 망상면은 일리, 심곡리, 괴란리, 만우리, 초구리, 발한리, 묵호진리, 동호리, 어달리, 부곡리, 노봉리, 대진리 등 12개 리를 관할함으로써 이때부 터 '12 망상'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동호리가 발한리에 통합되고, 일리와 노봉리가 통합 망상리가 되면서 10개 리로 개편되었다. 그 후 1920년경에는 다시 동호리와 노봉리를 발한리와 망상리에서 분리하였으나 1930년경에 다시 통합한 이후 현재까지 예전 묵호읍 지역은 10개 법정동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처럼 망상이란 땅이름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이와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나 이야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선조 13년(1580)에 강원 관찰사로 부임한 송강 정철(01K)은 관동지방을 순회하면서 삼척부에 머물렀을 때 기생 소복이 와 깊은 정분을 나누게 된다. 그 후 순찰을 다니는 사이에 소복이 강릉 망상촌의 선비에게 시집을 가버렸는데 마침 망상 촌을 지나면서 소복을 그리워하며 시 한 수를 읊었다. 우리 역사상 가사 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송강 정철이 망상 바다를 바라보며 연인을 그리는 애절한 심정으로 노래하였던 사연과 함께 시문이 강릉 읍지인 『임영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가까운 망상에 선녀 하나 있는데
푸른 구름이 바다에 자욱하여
소식이 아득하네
진주길 밟은 것을 뉘우치자니
행인의 마음 착잡하여 창자를 끊는구나.

하고는 또 곤축의 얼굴을 한번 보고자 유생들을 모아 크게 강석(품)을 베풀었는데 온 고을에서 모두 모였다. 송강이 소복의 남편 된 자를 보고 싶어 친히 명부를 점검 한 다음 감독자로 하여금 들어오도록 하니 최곤축이 비록 유생의 등록부에는 올라 있으나 본래 문장이 변변치 못할 뿐만 아니라 또 들어와 뵙는 것을 꺼려하여 다른 사람을 대신시켜 강석에 참여시켰다.

송강이 최곤축의 대리인을 보니 풍채가 쭈그러들고 행동거지가 조잡하기에 송강이 한탄하여 말하기를 "그 용모도 남을 움직이기에 부족한데 어찌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단 말인가!" 송강은 책을 펴지 않고 고강(복름)을 대충 마 쳤으나 사람이 바뀐 것을 알지 못하였다.

정철은 소복이 비록 기생이었지만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선경에 사는 선녀로 매우 아름다운 미인을 가리키는 선아에 비교하였으며,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을 창자를 끊는 아픔에 비유하였다. 한편으로 한때의 연인 소복이 잘살기를 바라며 그의 남편 최곤축을 한 번 보기 위해 망상촌 선비들을 모아 놓고 강석(講席)을 베푼 송강의 심정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 동해 천곡은 ‘모란반개형국’ 명당!

'천곡동의 유래와 풍수지리'에서 윤 회장은 "동해시 천곡동의 지명은 속 지명인 '샘실'의 한자지명을 훈차한 지명인 천곡에서 연유한 것이 확실하다."라고 주장했다. 천곡의 유래에 대하여 지역지 진주지 에는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한 시기인 "병진년(1916년)에 냉천(冷泉), 묘곡(苗谷), 덕곡(德谷), 항곡(項谷)의 4개 마을을 합 하여 천곡리(泉谷理))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1842년에서 1914년까지 북평지역을 견박면, 도하면, 도상면의 3개 면으로 운영하였으나, 일제는 1914년 전국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북평 지역의 3개 면을 북삼면으로 통합하였으며, 이때 냉천, 묘곡, 덕곡, 항곡 4개 마을을 합하여 천곡리로 하였다. 그러나 천곡이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부터 이미 사용해 왔던 지명이다. 광복 이후에도 천곡리는 북평읍 관할 법정리로 운영되다가 1980년 동해시 승격과 함께 천곡동이 행정동이 되면서 평릉동을 병합하여 관할하고 있다.

동해시 천곡동 지형, 사진_ 윤종대 동해역사문화연구회 회장

초록봉에서 내려다본 천곡동은 도시개발로 본래의 지형이 다소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시청 서남쪽 누에머리 산을 중심으로 사방의 산언덕이 꽃잎처럼 볼록볼록하게 둘러쳐진 모습이 마치 반쯤 피어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 형상을 만들고 있으며 골골이 흘러내리는 명당수가 꽃잎에 물을 주고 있는 모양으로 미화시키기에 충분하다. 천곡동과 경계를 이루는 용정동과 부곡동 쪽의 산줄기는 각기 용정과 부곡의 마을을 형성하기 위해 천곡을 등지면서 뻗어 내리고 있으나 천곡동 내의 산과 산줄기는 막 피어나는 모란꽃을 만들기 위해 약속이나 한 듯이 안쪽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은 자연 이 빚어낸 그림이지만 신기할 따름이다.

2013년 5월 1일 아시아투데이 신문기사에서는 우리나라 수도 서울 지형이 모란꽃 모양을 닮았다고 보도하였으며  기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 수도의 길흉은 나라 전체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서울의 명당 터를 기준으로 감평해 보았다. 서울의 중심부인 남산을 기준으로 사방 40리의 둘레가 원형의 형태이다. 풍수적으로 보면 남산은 주작(부를 형성하는 형상)이며, '꽃봉오리'이다. 남산 원형의 둘레는 마치 병풍을 빙~둘러쳐놓은 것처럼 보이고, 높고 낮은 산들은 꽃잎 형상이다. 한강은 동쪽에서 흘러와 한남동에 다다라 남산의 꽃나무에 물을 주고 서쪽으로 흘러가는 형국이다. 형상으로는 '모란반개형국 (모란꽃이 반쯤 핀 형상)이다. 터를 대지, 중지, 소지로 나눈다면 대지의 명당이다.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로 불리는 도선국사는 이미 1,000년 전에 서울을 가리켜 이곳 이 후손들의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강의중인 윤종대 회장, 사진_조연섭

윤 회장은 강의를 마감하며 "도선국사(827-898)는 조선의 수도가 될 것을 이미 1,000년 전에 예언하였으나 동해 천곡이 훗날 동해시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알고서 모란반개형국의 명당이 라고 명명한 사람은 과연 어느 시대의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진다. 모란꽃이 활짝 피었다면 머지 안아 시들어 버리겠지만 천곡의 지형은 이제 막 피어나는 꽃망울과 같다. 꽃잎이 시들지 않게 샘물이 흐르고 있으니 오늘도 내일도 시들지 않는 최고의 길지이며, 동북아 중심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운이 모인 명당이다. 아무쪼록 모란의 기운이 왕성하게 피어나 큰 인재가 나타나고 부귀영화가 그치지 안 는 만년 지지가 되길 기원해 본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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