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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r 01. 2024

동해 3.1 만세운동 기념비와 민초들의 함성!

78. 매거진 동쪽여행

동해시 3.1 만세운동 기념비와 민초들의 알려지지 않은 함성 

15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대항해 시대는 문명의 교류가 대륙을 통해서 이루어지다가 해양을 통하여 동양과 서양의 만남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인류 문명은 폭발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역사는 다양한 문명의 교류에서 침략의 성격으로 변질하는 시기도 있었다. 19세기 동북아시아의 한 곳인 조선은 이 시대에도 개방의 파도를 막아내며,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지만, 산업혁명이라는 큰 변화기에도 옛것을 추구하던 조선은 어느 날 준비되지 않은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세상은 제국주의 시대에 자국의 국익을 위해 남의 영토를 서로 점령해 가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는데, 메이지유신을 통해 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일본은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제국화의 길을가며 결국 조선을 본격적으로 병탄(竝呑)하기 시작하였다.   

병탄(竝呑):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
동해시 냉천공원 삼일 만세 기념비

이 시기에 지역민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대부분 지역 역사 속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이 벌어졌지만, 백두대간에 가로막힌 오지로서 기차 노선은 물론 육로조차 만족스럽지 못했던 영동 남부 지역 동해, 삼척은 늘 변방이며 세상 소식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1894년 봄 동학 혁명운동과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며 김홍집의 친일 내각의 등장한다. 7월의 갑오개혁, 12월의 김옥균의 갑신정변,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된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으로 이어졌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은 분노하는 민에 의해 피살되고 친러내각이 들어서는 급변하는 세상은 국민을 각성하게 했다.     


임진왜란 의병활동 이후 처음으로 1895년 10월 을미사변을 도화선으로 전국 곳곳에서는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강원특별자치도의 유인석 장군은 지역마다 격문을 돌리고 의병활동을 독려하였다. 최근 동해문화원에 의해 국역 발간된 '만재집'과 안승우 장군의 '격고 팔도 열읍'의 격문에 의하면 당시 강원도 삼척 북삼면 송정리에서도 을미의병의 주축인 유인석 장군의 제자이며 전군 장인 안승우 장군의 격고 팔도 열읍 격문이 1895년 겨울 송정에 도착했다. 만재집의 홍락섭 생부인 홍병정의 행장에 보면 홍긍섭, 홍휘남, 김현역 등이 격문을 보고 격분하며, 이에 대한 대처로 다수는 성리학을 더욱 연구해 세상의 선악과 권선징악의 모범을 이루자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홍긍섭은 홍휘남과 함께 격문을 필사하여 주변에 돌렸으며, 김헌경은 의병을 창의하고 강릉, 삼척, 울진에서 동지를 모았고 창의대장으로 추대되며 1896년 삼척지방의 의병을 이끌었으며, 관동의 진 관동창의가 민병호와 함께 삼척전투를 이끌었다. 김현경은 밀고 때문에 1910년 체포되어 경성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동해문화원 소장 안승우 장군 격문(격고팔도열읍_ 팔도 여러 고을에 호소)

1910년 결국 조선은 나라를 잃고 주권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던 민초들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3.1 만세 운동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들불처럼 퍼지는 만세 운동을 저지하려고 각종 시위 해산 및 총기 사용, 언론 통제, 학교 강제 휴교 등으로 지방 확산을 저지하곤 했다.    

  

동해시 효가리(당시 삼척시 북삼면) 출신인 김순하 학생삼척보통학교(1911년 개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유학 중이었다. 서울에서 경험한 삼일 만세 운동 모습을 보고 격분했다. 이 소식을 고향에도 전달해야겠다는 신념으로 독립선언문을 신발 밑창에 숨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생들에게 전하게 된다. 이에 삼척보통학교 전교생 176명은 4월 15일 교정에서 김달하, 오원모, 심부윤, 김치화, 김봉호, 홍동균 등의 학생대표와 김기식 선생의 지도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삼일운동 만세 시위를 삼척지역에서 최초로 시작하였다.


김순하의 고향인 북삼면도 한해 전 개교로 아직 학생 수가 적은 송정공립보통학교(현 북평초등학교 전신)는 4월 17일 오후 2시 4학년 김진수와 주하영, 홍학현등이 협의하여 어린 학생들의 주도로 50여 명의 학생이 송정보통학교 교정에서 북삼면에서는 처음으로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며,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홍학현의 주거하던 집도 왜병들이 불살랐다고 전해진다. 송정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의 특징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만세 운동이라는 점이다.


노도(怒濤) 같이 흘러가는 큰 물결 속의 작은 외침이었지만 지역의 삼일 만세 사건은 중앙으로부터 동쪽 마을까지 2개월간 지속되었다. 자발적인 비폭력 무저항의 전국적인 평화시위는 이후 일어난 중국의 5.4 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무 저항 운동 등 주변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숭고한 정신은 시대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며 애국의 역사다.      

노도(怒濤)_어떤 무리들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00년 전의 지역들의 조그마한 외침은 현재 대한민국이 세계사의 중심에 다가가는 위대한 변화의 실마리자 출발점이다. 우리는 그 시대의 용감했던 외침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자칫 잊어버리고 무심코 지나 칠 수도 있지만, 우리의 DNA에 새겨진 그 조그만 외침은 우리를 발전시키고 성장하게 만들고 있다.


늦은 감 있지만 1990년 9월 30일 생생한 그날의 함성은 현 송정초등학교(북평초 이전 검토 중) 자리에 동해문화원 김시래 초대 원장의 주도로 삼일 만세 기념비를 세우는 일과 후손들의 가슴속까지 전달됐다. 기념비 비문은 “1919년 3⬝1 만세는 조국의 독립을 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요 정당한 주장이었다. 온 겨레가 한 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물결이 폭발하였으니 삼천리강산이 진동할 때 어찌 이 고장인들 통분의 함성이 없었으리오. 향사에 기록하기를 4월 17일 오후 2시 주하영. 김진수. 홍학현이 주동이 되어 송정보통학교 교정에서 동교생 50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하였으니 이제 사적을 조명하여 선열의 애국정신을 드높여 길이 후대에 전하려 함이니라”라고 새겨져 있다.      

출처: 문화통신(2023년 겨울호), 글_ 동해문화원 동해학기록센터 연구원, 홍협 _교열, 조연섭  스토리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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