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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01. 2023

안묵호 어판장 아이들의 ‘전쟁놀이’

6.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1960년대 중 후반 묵호항은 오징어, 명태가 개락이었다. 나무판자도 흔했다. 오징어를 채 낚기 해 담는 그릇을 전부 판자로 짰기 때문에 부두에도 나무가 지천이었다. 비린내와 짠내가 배어있는 판자로 안묵호 아이들은 칼과 총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겨하며 놀았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어판장 앞에서 고기를 팔던 아낙들이 판자데기를 마르라고 세워놓고 가면, 아이들은 그걸 이용해 놀이를 즐겼다. 논골팀, 어판장팀, 신작로팀으로 나눠 총싸움과 칼싸움을 했다. 졸병들은 가시가 돋고, 비린내가 나는 판자로 엉성하게 만든 칼을 들고 대장 뒤를 따랐다. 대장과 부대장의 칼과 총은 빼 빠질(사포)을 하고 뺑끼칠(페인트)을 해 구분을 했다.

"돌격, 앞으로!"
"와......"

신작로와 어판장, 정박 중인 배가 아이들의 전쟁터였다. 한참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배가 꺼진다. 그러면 대장의 지시로 각자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마른오징어와 노가리, 동전을 꺼내 한 군데 모았다. 부대장이 그중 제일 나은 것은 대장에게 먼저 주고, 나머지는 대원들에게 골고루 나누고 돈은 찐빵을 사 와 먹었다. 그 와중에도 안묵호 아이들만이 하는 놀이는 따로 있었다. 이건 다른 동네에서 엄두도 못 내는 놀이였다. 먼저 ‘로프 장애물놀이‘가 있었다. 부두에 버려진 로프를 신작로로 갖고 와 길게 늘어뜨려 놓고 숨어 있다가, 같은 편이 의도적으로 도망치다 신호를 보내면 로프를 번쩍 들어 상대방을 엎어 뜨리는 놀이였다. 당시 세관 앞의 '경주상회' 집 셋째 아들이며 현 천곡동에 거주하는 김규진(남. 66)씨는 그 시절을 기억했다.

"부두에 못 쓰는 로프가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놀이였어요. 우리는 그게 많았지만, 다른 동네 애들은 만져보지도 못했지요. 또, 우리들은 숨바꼭질을 오발탄 놀이라 이름 붙여 놀았어요. 술래가 하나둘 하며 다 섯까지 셀 동안 숨지 못하면 '탕'하고 총을 쏴 죽이는 놀이였어요. 어판장에는 장애물이 많아 숨을데가 천지였어요. 하루는 제법 새 옷을 입은 채로 오발탄  놀이에 끼게 됐어요. 술래가 마침 어판장 기둥에서 세는 바람에 우리들은 정박해 있는 오징어배로 숨었어요. 그때 배는 작은 목선이 대부분이었죠. 술래가 하나둘 하자, 나는 숨느라 난간을 딛었는데 그만 배가 기우뚱하는 바람에 그 틈새로 빠지고 말았어요. 안묵호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제 몸 하나 뜨게 하는 수영 솜씨는 기본이었지만, 겨울이고 두꺼운 옷을 입어 나는 오르락내리락 물 먹으며 "이대로 죽는구나!" 할 때 집에서 같이 나온 '메리'가 컹컹 짖어댓어요. 진구들이 어른들을 불러, 그래서 살아났지요."
묵호항 광장, 사진_ 동해문화원 DB
미니스커트 새총놀이

김 씨는 또 다른 놀이로 '미니스커트 새총놀이'를 소개했다. 안묵호에는 어판장, 세관, 항만청, 수협, 대한통운이 있어 다방이 유난히 많았다. 아이들 눈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뾰족구두를 신고 한 손에 찻잔 쟁반을 들고 수시로 지나가는 레지들과 진해지고 싶어, 생각을 하다가 새총을 생각해 낸다. 판자 떼기를 장애물로 활용 숨어 있다가 레지가 지나가면 판자 틈 사이로 새총으로 미끈한 다리를 겨냥해 쏜다. 번번이 빗나갔지만, 한방이라도 맞으면 레지가 '아얐' 하며 주위를 노려보다 '야. 이 새끼야!'하고 쫓아오면 줄행랑을 쳤다. 안묵호 아이들 중에 조금 성숙한 아이들은 '찌게비'라 부르는 연장을 갖고 다녔다. 짧은 쇠막대 끝에 오징어 낚시를 홀치어 맨 거였다. 아이들은 이걸 옷 속에 숨겨 다니다가 어판장에서 입찰 보는 어른들 틈에 끼어 있다. 다리 사이로 '찌깨비'로 한 마리를 찍어 줄행랑쳤다. 또 지게꾼이 바소쿠리에 오징어를 담아 덕장으로 올라갈 때, 한 마리 두 마리 '찌깨비'로 찍어 훔쳤다. 지게꾼도 아이들 하는 짓을 알았지만, 짐을 조금이라도 덜해주는 편이라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덕장 주인은 자꾸 고기가 모자라자 자게꾼 뒤에 리어카 꾼을 붙여 한조가 되도록 해 감시했다. 안묵호 아이들은 이렇게 훔친 오징어, 고기를 식당에 팔아 용돈으로 쓰기도 했다.

묵호, 단관극장이 4개나 있었다.
안묵호 문화극장, 사진_동해문화원 DB

당시 묵호에는 발한 삼거리의 묵호, 안묵호의 문화, 역전의 동호, 보영극장 등 단관극장이 4개나 있었다. 당시 극장에는 영화만 보는 게 아니고 쇼도 자주 개최했다. 박노식, 허장강, 황해 등 액션배우, 오기택, 황금심, 김용만 같은 가수와 몸놀림이 환상적인 무용수가 오는가 하면 분장을 한 배우들이 연극을 해 눈물을 짜게 했다. 안묵호 아이들은 쇼가 있는 날이면 기를 쓰고 '극장 개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구멍을 통과하면 구린내가 진동하는 화장실이고 독사 눈으로 기도를 보는 형에게 잡혀 얻어맞곤 했다. 그렇지만 안묵호 아이들은 마치 그 쇼를 못 보면 죽을 것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문화극장은 발한동과 안묵호를 구분하는 경계에 있었다. 안묵호 아이들은 발한동 아이들과 문화극장에서 만나면 긴장했다. 결고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애들은 중앙시장과 관사, 읍사무소, 강호소주, 묵호극장을 지역구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애들이 어판장에 오면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문화극장 같은 경계지역에서 만나면 사정이 달랐다.

"일 대 일로 할래?"
"삼 대 삼으로 붙자."
"좋아!"

두 대상끼리 결정하면 웃통을 벗고 온갖 폼을 잡고 싸움을 시작했다. 주로 영화에서 본 폼도 잡아보고, 해군과 건달 형들이 패싸움할 때 본 것도 써먹다가 '막무가내'로 손발을 휘젓다가 상대방이 코피가 나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발한 삼거리와 안묵호의 대장급이 만나면, '백화원' 문제로 싸우기도 했다. '백화원'은 묵호에서 제일 큰 요정이었다. 아이들이 조금만 발돋움을 해서, 담 너머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섹시들이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끔 장구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전축에서 나오는 노래와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섹시들의 노랫소리가 먼 귀로 들려온다. 이 '백화원'이 처음에는 안묵호의 세관 앞 한옥에서 시작되었다. 몇 해마다 주인인 '또순이 아줌마'가 몸이 아프자 '아가씨 마당'에게 넘겼는데, 그 마담이 발한동으로 옮겨 장사를 했다. 그래서 두 대장급은 '백화원'이 서로 '우리 거다' 우기다 치고받는 싸움가지 하곤 했다. 당시 묵호 어항은 나무로 짠 부두였다. 어판장도 바로 이나무 부두 옆에 있었다. 신작로 옆으로는 백사장이 있었다. 안묵호 아이들은 이 백사장에서 모래찜 하다 우르르 부두로 몰려가 수영을 하곤 했다. 선박 검정회사를 운영하는 김규진 소장은 다이빙을 처음 하던 때를 회상했다.

나도 이다음 어른이 되면 항구를 밝히는 사람이 될 거야!
"안묵호 아이들이 깡을 키우는 데 필수적인 게 다이빙이었어요. 배들이 드나드는 항구에 뛰어든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수영도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니 혼자 개헤엄으로 손 발을 부지런히 흔들어 터득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부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밑바닥이 안 보이는 시커먼 물은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서웠어요. 그런데 그곳에 뛰어내리다니!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나무 어판장에서 바닷물에 뛰어들던 11살 때를 생각하곤 해요. 부대장을 시켜준다는 대장의 말에 용기를 냈지요. 눈을 질끈 감고, 불알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하늘로 점프했다. '풍덩'하고 물에 뛰어내렸어요. 순간 해냈다는 기쁨과 이 무서운 물에서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을힘을 다해 헤엄치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각나곤 해요.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들 중 대다수가 묵호를 떠났어요. 내가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항구에서 일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판장에서 보아왔던 밤 불빛 때문인지 몰라요. '나도 이다음 어른이 되면 항구를 밝히는 사람이 될 거야!' 하며 밤 불빛을 바라보며 여러 번 결심을 했거든요."
묵호 어판장 바지게, 사진_동해문화원 DB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묵호(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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