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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02. 2023

검은 나라, 묵호 이야기!

7.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최대 무연탄 수출항, ‘묵호’를 검은 나라로 만든 ‘노천 무연탄 저탄장’ 이야기 추억여행!

1931년 시작된 묵호항 축항공사가 6년의 긴 공사 끝에 1937년 드디어 항이 개항된다. 그 기간 동안, 정어리가 무진장 잡히자 묵호해변 일대에 정어리기름 가공 공장이 여러 개 생겼다. 기름이 모아지면 작은 목선에 싣고, 외항에 정박 중인 큰 배로 실어 날랐다. 당시 삼척 정라진에는 대단위 미쓰이 유지공장이 들어서서 이미 정어리기름을 가공해 운반하고 있었다. 정어리기름은 원래 불포화지방산이 많아 의료품, 비누, 화장품 원료로 쓰였지만, 일본은 석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이 정어리기름도 연료로 사용했다.

2020년 동해문화원 역사문화연구회 강동수 연구원의 조선총독부 고시문서 공개로, 당초 개항연도로 표기되던 1941년에서 1937년으로 표기가 조정됨

1937년, 일본은 에너지 확보자원에서 묵호에 삼척개발(주)를 설립해 카바이드, 질소비료 등을 생산하는 북삼화학, 질 좋은 무연탄을 채굴하기 위한 삼척탄좌, 탄을 수송하기 위해 삼척철도, 선적하기 위해 묵호항을 만들었다. 무연탄을 빨리 선적하기 위해 묵호항 중앙부두에 선적 기를 정비하고, 부곡 유천당 아래에 수원지 공사를 하고, 선박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수도관을 매설하고 급수 시설을 놓았다. 부속시설로 삼척개발(주)사무실과 일본인 근로자가 숙식할 관사를 밤나무골 연덕에 지었다.


그 후,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철암선, 영암선, 함백선 등의 철로를 개설하다 중단하다를 반복하다 1965년, 고한 사북의 민둥산 철도까지 개설했지만 전국에 무연탄을 수송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대체 안으로 나온 것이 일정강점기 때부터 해왔던 방법 즉, 묵호항을 통한 수송이었다. 더구나 5.16 후에 주요 국가시책인 산림녹화 5개년, 경제개발 5개년, 화력발전소 건설, 새마을운동 등, 이 모든 정책의 밑바탕에 무연탄이 있었다. 정부는 이 무연탄의 채굴과 수송에 각종 혜택을 주었다. 수송 쪽에서도 분진도 환경오염에 대한 제재는커녕 보조금까지 지원했다. 제주도의 연탄수송을 책임졌던 대양연탄의 묵호출장소 소장 출신의 한인숙(여, 82)씨는 당신의 많은 것들을 기억해 냈다.

"연탄은 1급에서 9급까지 있었는데, 가정용 구공탄은 4,200칼로리에 7급이 규격품이었어요. 전국에 있는 연탄공장 대리인들이 묵호에 거주하며 이 규격품의 연탄을 확보하기 위해 석탄공사나 민영탄광의 관계자들을 만나 로비를 했죠. 묵호에 많은 출장소가 있었지만 나는 주로 여수의 합동연탄, 부산의 경남연탄, 마산의 마산연탄 소장들과 자주 만나 정보교환을 했죠. 우리 같은 소장 말고 선박회사 대리점들도 연탄을 신속하게 싣기 위해 화주에게 로비를 했어요. 연탄보다 배들이 더 많아 외항에 늘 열 척 정도 대기했기 때문이었지요. 그 배들 중에는 포항이나 속초 등 비 교적 가까운 항구로 가는 배는 350톤 정도의 목선이었어요. 이런 배는 중앙부두에서 항운노조가 리어카나 목도로 선적했어요. 그러나 제주나 목포 군산 등 먼 곳에 가는 배들은 천 톤 급의 철선이었어요. 또, 석탄공사가 직접 운행하는 배는 비교적 컸고 통신관이 꼭 탔어요. 그 당시는 이 통신관이 중요한 직책이었어요. '무슨 배가 어디서 몇 시에 몇 톤을 싣고 어디로 출항한다' 등을 본사와 지점으로 연락했지요. 그리고 큰 배들은 일제강점기 때 설비한 선적기로 홍익회에서 선적했어요. 그런데 빨리 싣는 건 좋았으나 당시 분진에 대한 단속이 없어 그야말로 묵호항과 시내 일대는 검은 탄가루로 뒤덮였지요. 너무 심하면 치장에서 컨베이어를 타고 오는 탄에 바가지로 물을 뿌렸어요. 그러면 화주가 쫓아가 탄 무게가 더 나간다며 소리소리 질렀어요. 당시 선적기에는 바퀴가 달려있어 레일로 전진 후진이 가능했지만, 선적 자바라는 고정이 되어있어 탄을 골고루 싣기 위해 앙카를 박아 놓고 배를 벌렸다 붙였다 하며 실었어요. 그러자니 선박에 시트를 쳐 방진을 하는 등의 조치를 할 수 없었어요. 오히려 홍익회에서 탄가루를 많이 마신 다는 이유를 붙여 분진할증료로 작업비의 50%를 더 받아냈지요."

탄가루는 배에 선적할 때만 날리는 게 아니었다. 도계에서 수십 량의 화차에 무연탄을 싣고 달려온 기차는 일단 묵호항역에 대기하다, 항구 안에 있는 노천 탄장으로 왔다. 철로는 저탄장 위에 있어, 홍익회 근무자가 화차의 문을 양쪽에서 열면 탄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탄가루가 구름처럼 하늘 높이 날았다. 저탄장에는 큰 칸막이 구조물이 있어 화주와 계약한 양을 하역한 후 다음 칸에 또 하역하느라 탄가루는 하루 종일 날렸다. 화차에서 하역된 연탄은 레일 밑으로 나 있는 굴을 통해 아래쪽의 벨트를 타고 선적기로 실려 갔다.


한편, 정동진에 있는 탄광에서 트럭에 싣고 항구로 오는 무연탄은 부두 야적장에 쌓아놓았다. 이 탄 역시 시트로 덮는 등의 조치를 하지 않아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려 묵호 시내로 날아갔다. 야적장의 연탄 중 화력발전소로 가는 탄은 주로 질 낮은 것들이었다. 이 무급탄은 질이 나빠 도 감미용으로 야적장 밑에 수시로 깔아질 좋은 탄과 섞이기도 했다. 야적장에 상주하는 페이로다 기사는 야적 물량이 없어지면 늘 바닥이 푹 파였는데, 이곳에 무급탄을 깔아 매웠다가 다시 트럭에 실을 때는 급수탄과 섞어버렸다. 연탄공장에서 흙까지 섞어 구공탄을 만드는 실정이라, 무급탄이 섞였다 해도 품질에 큰 지장이 없었다. 또, 야적장이나 저탄장이나 늘 바람에 비산 되어 없어지는 탄의 양이 만만치 않은데, 이걸 보충하는 게 무급탄이 한 역할을 했다.


또, 부족분의 탄은 비와 습기로 어느 정도 상쇄했다. 탄을 선적할 때는 부피로 측정하는 게 아니라 무게로 했기 때문이었다. 화주나 선박, 대리점 관계자들이 무엇보다 고맙게 생각하는 게, 바로 돌덩이 탄이었다. 이 돌덩이를 깨면 배의 부피로 늘어나 손실 양을 보충하는 효자였다. 그 래서 관계자들은 탄이 바람에 새카맣게 날아가고, 비 맞아 축축해져도 서류에 적힌 대로 제 양이 항구에 도착했다는 자체가 신기해, '탄은 요물이야!' 라며 흡족해했다. 한 소장이 지금은 술 담배 모두 끊었지만, 50여 년 전에는 묵호 경제를 살리는 데 자신이 일익을 맡았노라고 회상했다.

"당시 묵호에는 백화원, 영동관, 강남원 같은 요정이 많았어요. 이 런 고급요정에 단골로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 나도 끼었어요. 건조인 관계자도 많았지만, 우리 같은 연탄공장 소속의 출장소장이나 석공과 민영탄광의 간부, 선장과 선박대리점 소장 등이 주요 고객이었어요. 어느 출장소나 물량 확보와 품질 좋은 탄을 구입하기 위해 로비했다고 영수증을 첨부하면 본사에서 군말 않고 결제를 했어요. 커피 한잔에 50원 할 때인데, 판공비를 10만 원이나 줬으니, 그 돈이 전부 묵호 바닥에 쓰였어요. 또, 그때는 통신시설이 좋지 않아 빽 없고 돈 없으면 백색전화를 놓지 못했어요. 그런 백색전화가 우리 같은 출장소장 집에는 필수였지요. 소장의 역할 중에 제일 중요한 게 7등급의 연탄을 확보하는 거였어요. 나는 무연탄을 척 보면 첫눈에 몇 등급짜리인 걸 알아맞힐 정도가 되었지요. 당시 제주도로 가는 연탄은 제일 좋은 거였어요. 제주도청에서 직접 관여해 국비보조 외 수송비, 해상운임, 하역비, 연탄 생산비, 배달비 들을 도비로 지원해 연탄값을 낮췄어요. 만약 이런 보조가 없었다면 서민들이 어떻게 싼 값에 탄을 사 땠겠어요. 연탄 수송의 독점권을 따낸 선박회사는 제주와 서귀포에 직접 연탄 공장을 지어 1 9공탄을 찍어 팔았어요. 나는 지금처럼 한라산의 나무숲이 울창하게 남아있는 이유가 무연탄 덕이라 생각해요. 6,70년대에 각종 보조비가 없어 연탄값을 실제 원가만큼 책정했더라면 누가 그 비싼 탄을 샀겠어요.? 한라산에 올라 나무를 해 와 아궁이에 불을 지폈겠지요."

구멍탄은 이제 추억의 자원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IMF 이후 서민의 연료로 다시 각광을 받고, 각종 고기구이용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1982년 정부는 구멍탄을 규격화했다. 이 연탄은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 있어 오랫동안 난방과 취사로 사용되었다. 첫 구멍탄은 구멍이 9개였다. 석탄과 물, 진흙을 섞어 틀에 넣고 나무망치로 내리쳐 압축해 구 공탄을 만들었다. 그 후 기계화 자동화 되어 구멍이 19개, 22개, 25개로 변 했고, 지름이 15cm 높이 14.2cm 무게 3.6kg의 규격품이 전 국민의 등을 따 시게 했고, 따뜻한 밥과 반찬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연탄가스로 인해 수많은 생명을 잃기도 했다. 석유와 가스 공급이 일반화되자, 제주도 한라산의 나무를 지켜주었던 연탄공장이 결국 2004년 3월 문을 닫게 되었다. 묵호를 검은 나라로 만든 노천 저탄장에 상옥시설이 들어선 것은 1980년 초였다. 묵호항 내에 많은 면적을 차지한 이 거대한 시설물은 불과 몇 년밖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석탄합리화 정책으로 탄광이 문을 닫고, 재단을 대폭 줄어 더 이상 묵호향까지 신고 울 물량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시설물에는 현재, 무연탄 대신 제철공장 부원료인 석회석을 영동지역 광 산에서 대형트럭들이 싣고 와 보관했다가 선적하는 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연탄 하역장면, 사진_동해문화원 DB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묵호,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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