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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04. 2023

아직도 못다 한 ‘묵호항’ 이야기!

9.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장마철인데 비는 안 오고 연일 폭염과 열대야가 계속되었다. 게다가 여름철 보너스인 오징어가 잡히지 않자, 묵호항 사람들은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동해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루빨리 근해에 걸쳐 있는 한류가 물러가고, 거대한 오징어 떼와 함께 난류가 흐르기를 바랄 뿐이었다.

묵호항 어펀장, 사진_강동호

오징어는 묵호를 먹여 살려왔다. 예전 화려했던 묵호는 오징어 때문에 걱정했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넘쳐흘러 처치 곤란할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급냉동시키는 시설 자체가 없어, 덕장을 비롯해 건조할 만한 빨랫줄, 울타리, 바닷가, 가로수에 줄을 쳐 내걸었다. 오징어가 놀놀하게 말라가다 소나기라도 맞으면 사람들은 지체 없이 골짜기나 구렁텅이에 버렸다. 싱싱한 오징어가 계속 나는데, 품질이 손상된 것에 정성을 들여봐야 제값 받기가 글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묵호 일대에는 연탄가루 냄새와 오징어가 썩는 듯, 상한 듯 나는 묘한 냄새가 진동했다. 농촌마을인 천곡에도 늘 오징어 냄새가 진동했다. 천곡의 농부들은 수확한 농산물을 묵호로 팔러 갔다가 돌아올 때는 곡물이 뚝뚝 흐르는 오징어를 몇 접씩 사 와 줄에 널었다. 묵호와 가까이 사는 일종의 혜택이었다.


먼 마을 사람들은 겨우 반찬용으로만 몇 두름 사 올 뿐이었다. 아무리 일에 이골이 난 농촌 아낙이라 해도 젖은 오징어를 한 대야 머리에 이고 십리 길을 간다는 건 무리였다. 당시 천곡마을은 신작로 옆으로 아름드리 미루나무가 있었다. 농사를 크게 짓는 알부자들은 젖은 오징어를 손수레나 달구지로 사 와, 미루나무 사이에 새끼줄을 쳐 오징어를 널었다. 논밭에서 일하면서 신경은 오징어에 가 있었다. 비를 안 맞히고 제대로 건조하면 목돈이 되었지만, 소나기를 한 번이라도 맞히면 그대로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50년 전, 부산에서 살다 묵호로 이사 온 박분달(여, 89) 할머니는 묵호에 온 첫날을 잊지 못했다.

"남편이 상사인 서장과 의견 다툼이 있었어요. 그래서 묵호로 좌천되어 왔어요. 우리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강원도 묵호를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큰 애는 걸리고, 작은 애는 업고 한밤중에 도착했어요. 캄캄한 밤이었는데, 어디선가 등대의 긴 빛줄기가 동해바다로 내뿜으며 길게 비추고 있었어요. 그 빛이 사라지면 수많은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별처럼 보였어요. 또 등대 주변으로 작고 고운 불빛들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마치 지중해의 어느 해안 도시처럼 낭만적이기까지 했어요, 나는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첫인상이 너무 좋아 그날 밤을 달콤하게 잘 수 있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눈을 떠보니 세상에! 어젯밤 본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바다는 망망대해고, 육지에는 볼품없는 판잣집과 슬레이트집만이 산 언덕에 그득했지요.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오징어요. 냄새 또한 오징어의 묘한 냄새였어요."

이런 묵호였는데, 오징어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다. 묵호항 북방파제 입구에서 각종 배와 횟집에 산소와 아세틸렌을 납품해 온 이양수(남, 74)씨도 묵을 맛이라 했다. 몇 년 전부터 대형 횟집센터는 물론, 새로 생기는 횟집마다 찬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배관시설을 설치하고 기포기를 돌리기 대문에 산소가 예전 반밖에 안 팔린다고 울상이었다.

"산소 장사는 둘째 치고, 묵호에 오징어가 잡히지 않아 정말 큰일이요. 묵호는 오징어가 나야 뭐든지 제대로 돌아갔거든요. 항구에 정박 중인 저 배들 봐요. 바다로 나가봐야 기름값도 못 건지니 맨날 제 자리 나 지키고 있잖아요. 장마철에는 비가 쏟아지듯이 여름 묵호는 오징어 냄새가 진동해야 하는데, 날씨나 오징어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소. 나는 묵호가 고향이고 운이 좋아 이른 나이부터 묵호항에 드나들었어요. 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껴요. 눈에 보이는 건 지금이 훨씬 화려하지만, 경기 자체를 놀고 보면 예전에 비해 요즘은 게임 자체가 안 돼요."

이양수 씨는 눈을 잠시 감더니, 묵호항과 더불어 살아왔던 지난 시절의 화려했던 추억을 회상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운 좋게 삼척산업(지금의 동부메탈) 묵호영업소에 취직했다. 당시 묵호항은 장성, 도계 등 탐광 지역에서 나는 무연탄을, 전국의 각 항구로 싣고 갈 배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연탄이 워낙 고가이고 귀한 것이라 화주나 선원, 선박회사 대리점, 검수회사, 납품업자들이 묵호에 거주하면 돈을 물 쓰듯 했다. 당시 묵호항은 코크스를 선적한 일본 선박이 자구 입항했다. 코크스는 삼척산업에서 용광로에 쓰는 중요한 연료이고 값이 고가였다. 이 씨는 묵호 토박이라는 이유를 대며 밤낮으로 부두에서 근무했다. 한창 젊은 나이고, 코크스가 워낙 고가이다 보니 훔치려는 사람이 많아서였다. 낮에는 중앙부두에 하역한 코크스를 뗏마에 싣고 발한천을 거슬러 가서 지금의 신협 뒤 야적장에서 트럭에 상차하고 떠날 때까지 감독을 했다. 밤에는 부두에 하역한 코크스 주위를 지키는 경비 일을 했다.

"지금은 묵호항 정문이 향로동 쪽이지만 예전에는 안묵로 쪽이었어요. 코크스를 실은 일본배가 들어오면 선원들이 나를 제일 먼저 찾아요. 당시, 일제 삼단 양산이 엄청 인기였는데 그걸 사라고 유혹했어요. 그들을 항을 나갈 때 세간에서 몸수색을 했지만 나는 정식 직원이라 무사통과 했지요. 나는 처음에 돈 없다고 고개를 흔들죠, 그러면 애가 탄 선원들이 할 수 없다는 듯 값을 깎아주죠. 나는 개선장군이 칼 차듯이 허리춤에 양산 다섯여섯 개를 꼽고 태연히 정문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곤 곧장 '백화원'이나 '충북관'에 갔어요. 나만 나타나면 난리였어요. 예쁜 색시 수십 명과 마담까지 버선발로 달려와 양산을 사 갔어요.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게 있으니, 나는 회사 간부나 학교 선배에게 전화해서 '백화원'으로 놀러 오라 하죠. 그날 저녁은 내 생일이나 다름없어요. 색시들이 서비스 안주와 술을 갖고 와,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삼단 양산을 더 구해 달라며 아양 떨며 난리였어요."

묵호항의 경기가 한창 좋을 대 우후죽순으로 생긴 게 고급 술집이었다. 오징어, 명태, 노가리 등의 건조물을 매매하는 상인과, 질 좋은 무연탄을 확보하고 선적하는 일에 관여된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 그들을 유혹하는 집들은 백화원, 충북관, 강남원, 서울관, 명월관, 영동관 등의 고급 방석집이었다. 그중 백화원이 가장 크고 아가씨도 많았다. 한창 호경기 때는 아가씨가 100여 명이 넘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호기 있는 남자들은 이곳에 한번 가보는 게 지상과제였다. 웃음이 끝나지 않는 대화, 자개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정종, 섬섬옥수로 구절판 신선로의 안주 하나하나를  집어 먹여주는 서비스, 흥과 멋을 돋우는 전자오르간 반주가 있는 데가 '백화원'이었다. 그러나 한 상에 3만 원(특별상은 5만 원)이 넘는 술값과 아가씨 기본팁, 한곡에 300원씩 하는 노래비(전자오르간 반주에 3곡 부르면 500원)에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못 냈다.


그렇다고 돈 많은 사람들만 묵호에서 즐기는 게 아니었다. 서민들도 즐기며 술 마시는 집들이 시장과 골목에 즐비했다. 특히 보영백화점과 묵호극장 뒤편의 '진땡이'(독한 막걸리) 집들이 큰 인기였다. 술값도 싸고 아가시들과 진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아가씨들은 '색시촌') 훗날 상가복합아파트를 짓고 '부산가'라 불렀다)에서 사내들을 호객하러 나왔다가 잠시 들렀기에 수시로 바뀌었다. 화물선박 선원들은 주로 역전 굴다리 입구에 있는 '무교동'이라 부르는 향로동 골목으로 많이 갔다.


새벽 배를 타야 하는 선원들은 어판장 앞 묵호시장 뒷골목에 있는 '텍사스촌'이라 부르는 쪽방 집으로 갔다. 남자 두 여자 둘이 개다리소반을 복판에 놓고 술을 마시며 젓가락 장단으로 노래를 불러댔다. 당시 주로 먹은 술은 따끈하게 데운 정종이지만, 술값이 무서우면 향과 맛이 비슷한 법주를 많이 마셨다. 이양수 씨는 '텍사스촌'에도 친구들과 몇 번 드나들었다며 당시의 모습을 기억했다.

묵호 발한동 뒷골목, 사진_동해문화원 DB
"한번 쪽방에 자리 잡으면, 한 되짜리 정종을 몇 병은 거뜬하게 마셔대니, 술집 주인들이 자꾸 양을 속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고안한 게 문 앞에 고물을 매 놓고 주전자를 매달았어요. 첫 주전자가 늘어져 서면 금을 그었다가 나중에 들어오는 주전자와 비교하는 거지요. 그 많던 쪽방은 이제 다 없어지고 연운을 남긴 고요한 흔적만이 조금 남아 있지요. 당시 부두 풍경 중에 외상값을 받기 위해 흑산도에서 온 포주와 색시들이 볼만했지요. 그들은 하도 멀리 고생고생하며 와서인지 억세고 거칠기가 보통이 넘었어요. 술값 외상이 있는 선원들을 끝끝내 찾아서, 멱살 잡기는 보통이고 제발 살려달라고 두 손 싹싹 빌 때까지 허리띠를 꼭 잡고 죽어라 놓지 않았어요."

동해를 기억하면 우리는 늘 묵호를 떠올렸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기항지, 묵호에 가면 오징어만 날라도 살 수 있다.' 등 묵호가 부흥하던 시절 어록들은 이제 구호에 불과해지고 있다. 이제 묵호는 논골담길과 스카이밸리, 해랑전망대, 묵호 중앙시장, 어시장 등 관광자원과 함께 동해시의 5대 권역별 관광자원의 하나로 최근 새로운 핫 플레이스로 주목받으며 관광자원으로 변화하고 있다.

논골담길 바람의 언덕에서 동해를, 사진_임황락 작가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묵호,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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