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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05. 2023

동해 송정에 ‘삼척 비행장’이?

10.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동해시 탄생 이전 삼척군 북평읍 시절 송정입니다. 1959년 10월 착공한 송정의(당시 삼척군) 삼척비행장이 2년 공사 끝에 1961년 12월에 완공됐다. 명사십리를 자랑하던 송정해수욕장 반을 차지한 면적이었지만, 대다수 송정사람들은 또 하나의 자부심으로 받아들였다. '북평역'이 송정에 준 선물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북평역'과 달리 '삼척비행장'은 그 흔적조차 사라졌다. '동해항' 개발로 '앞들'과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당시, 비행기를 탑승했던 경험이 있거나 비행장에 근무했던 사람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이젠 손꼽을 정도밖에 없었더,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흘러서일까, 아니면 송정 사람들과의 인연이 적어서일까, 삼척비행장에 3년 근무했다는 김광현(남, 66)씨를 어렵게 만났다. 그는 뜻밖에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송정비행장 관제탐, 사진_ 동해문화원 DB
"비행장은 송정에 있었지만 정식 비행장 명칭은 '삼척비행장'이었어요. 출장소가 삼척과 묵호, 송정에 있었어요. 송정 출장소는 시장 쪽의 청파다방 2층에 있다가, 극장 옆의 2층 집으로 옮겼지요. 이 출장소에서 표를 팔았어요. 활주로가 있는 본점은 민항 비행장 소속의 직원과 교통부 소속 감독 공무원들이 같이 근무했지요. 삼척경찰서 소속 경찰관이 파견 나와 검문검색을 하던 시절이죠. 나는 3살 어린 황덕길이란 후배와 같이 근무했는데, 그 친구는 주로 화물과 비행기 계류장 유도, 배터리 부착, 트랩 아웃 등을 맡았어요. 그때만 해도 화물 나르는 차가 없어 황 후배가 리어카로 부지런히 비행기까지 날랐지요. 나는 주로 서무를 봤는데 한 달에 한번 김포 본사로 출장을 가서 봉급과 서류를 수령해 왔었죠. 또 매일 입금된 돈을 묵호 한일은행으로 가서 KAL 본사가 있는 서울 소공동 지점으로 송금했어요. 평소에는 오전해 한번 착륙했다가 오후에 이륙해서 한가했지만, 해수욕철이 되면 니일 내일이 따로 없었어요. 그때는 오전 오후 두 차례 뜨고 내렸어요. 그러다 보니 나도 착륙할 때 깃발을 흔들며 계류장으로 유도하는 일도 여러 번 했지요. 당시의 여객기는 F27 쌍발기라 해서 바퀴 두 개가 앞쪽에 있었어요. 그 비행기는 뒷바퀴가 먼저 뜨면서 활주로를 이륙했어요. 처음에는 44인승이었다가 나중에는 62인승 YS-11로 바뀌었지요. 이 비행기는 요새처럼 앞바퀴가 먼저 들리는 신형이었지요."

당시 서울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강릉과 대관령을 넘어 버스로 간다는 건 도착 시각을 예측 못했다. 기차 또한 청량리까지 가려면 10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정부는 1958년에 강릉비행장을, 이듬해는 삼척비행장을 착공해 영동지역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했다.단골손님은 주로 삼척지역  무연탄을 취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본사와 탐광, 묵호항으로 수시로 다니며 우리나라 유일한 지하자원을 유통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동해안의 건어물을 수출하는 업자들도 시간을 다투어야만 했다. 건조한 오징어와 북어, 성게 알을 일본 사람들이 좋아했다. 덕장 주인, 중간 상인, 수출 알선책들은 납품 날짜와 물량을 맞추느라 비행기를 자주 이용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송이는 엄청 인기가 좋았다. 워낙 귀하고 비싸, 서민들은 먹어볼 꿈도 못 꿨다. 상인들이 현지까지 다니며 전량을 매수해 서울의 백화점에 납품하거나 일본으로 수출했다.  송이는 생물이라 혹여나 상할까, 화급히 바라바리 짐을 꾸려 김포공항으로 보내곤 했다. 그 양이 엄청나 울진의 송이가 전부 '삼척비행장'에서 수송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외화벌이 자체가 없던 시절, 그나마 송이와 건조 오징어가 체면을 세워주었다.

윤치영 공화당의장 일행 비행장 방문, 1968년

이들 상인 외에 꾸준한 고객은 본사가 서울에 있는 동양시멘트쌍용양회, 삼척산업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본사에 회의가 있거나 현장에 문제가 발생하면 비행기를 당연하게 이용했다. 회사 차원에서 비행기 표를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은 요금의 50%를 할인해 주었다. 송정출신이며 강원도 기획업무와 동해시 부시장을 역임한 홍경표 전 동해문화원장은 당시 청와대 업무보고 시 이 비행장을 활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지방의 고위직이라도 서울로 출장 가는 일은 많지 않았고, '동경사‘ 에 근무하는 장교들이 많이 이용했다. 1972년도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던 최승혁(남, 61)씨가 그때의 설렘을 기억했다.

" 그해 5월. '베티'란 태풍이 전국을 강타했어요. 이때 내린 폭우로 영동선 기찻길 다리가 떠내려가 철로가 끊어졌어요. 영동지역 학생들은 2 학기 개강에 맞춰 상경해야 하는데 다들 발을 동동 굴렀어요. 대다수 등록금도 겨우 마련하는 실정인데, 언감생심 비행기는 꿈도 못 꾸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중앙병원 집 딸은 비행기로 서울로 간다더라!라는 말이 송정 에 돌았어요. 그런데 그 누나를 은근히 좋아하던 사촌형도 비행기 표를 사자, 어머니는 평소에 작은집과 묘한 경쟁 심리가 있었던 터라, 나도 그 비 싼 비행기를 탈 수 있었어요. 그때 하숙비가 천 원이었는데, 표 값이 삼천오백 원 했지요. 나는 비행기에 오르자 격세지감을 느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1962 년, 할아버지 손을 잡고 비행기를 보러 간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활주로가 완공되자, 시험비행 한다며 경비행기 한대가 착륙한다 했어요. 볼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 하얀 두루마기 입은 어른부터 까까머리 아이들 까지 백사장 일대에 꽉 찼었지요. 그랬었는데, 10년 만에 대학생이 되어 비행기를 직접 타보다니! 긴장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다 보니, 유니폼을 곱게 입은 스튜어디스가 과자와 음료수를 갖다 줬어요. 그걸 조금씩 먹고 있다 보니 벌써 김포에 도착했다고 기장이 방송했어요. 공중에 떠있다 45분 만에 착륙한 거지요. 그런데 착륙해서 활주로로 돌아서 대합실까지 나가는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았어요. 김포 대합실에서 나와 리무진 버스를 탔더니, 명동의 KAI 본점 앞에 세웠어요. 나는 그때 비행기를 처음 탔지만, 해수욕을 온 사람들도 비행기가 뜨면 전부 일어나 손을 흔들며 환호를 지르며 신기해했지요. 그리고 비행기가 이륙하기 1시간 전부터 비행장 직원이 활주로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호루라기를 불어 울타리 밖으로 나가라며 소리 질렀어요. 나중에 그게 힘들었던지 오토바이를 타고 와 해수욕객들을 울타리 밖으로 몰았지요. 해수욕객 중 송정 사람들이 유난히 활주로로 많이 갔는데, 그 이유가 몸을 덥 히러 갔어요. 바닷물에서 조개를 한참 줍다 보면 입술이 파래질 정도로 추 웠는데, 모래보다 활주로에 가 엎드리면 따뜻한 게 그리 좋을 수가 없었지요"
 신혼여행 배웅, 관제탑 앞, 사진_동해문화원 DB

당시 신혼여행지로 경주가 으뜸이었지만 가을에는 단연 설악산을 많이 선호했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해수욕을 겸해 많은 신혼부부가 '삼척비행장‘으로 왔다. 이런 고객을 위해 트랩 옆에 항상 리어카가 대기했다. 신혼부부는 하나같이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갖고 왔기 때문이었다. 여름철만 되면 후배 황덕길과 같이 수많은 짐을 리어카에 싣고 운반했다는 김 광현 씨가 그 시절이 그립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시_ 공무원 봉급 7,600원
당시_ 비행장직원 봉급 15,000원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비행장에 근무할 때가 가장 보람 있었어요. 사람들 눈에 확 띄는 파란 윗도리와 쥐색 바지, 하얀 와이셔츠와 빨강 넥타이를 매고 항상 근무했지요. 여름철에는 이 복장으로 황 후배와 리어카를 밀 때도 있었지만, 해수욕을 온 여학생과 서울 처녀들은 이런 모습이 더 멋있게 보였는지 데이트 신청이 많았어요. 송정이 처음이니 해수욕장까지 안내해 달라, 민박집을 구해 달라, 무릉계는 어떻게 가느냐? 등의 말로 나와 같이 지내려 했어요. 당시 공무원 친구의 봉급이 7,600원쯤 받았는데, 나는 그 배인 15,000원을 받았어요. 막걸리 한 주전자 값이 50원이었으니, 봉급이 엄청 센 샘이었지요. 나는 어렸을 때 워낙 어렵게 자라,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저축을 했어요. 가끔 생기는 팁으로 잡비를 써도 충분했어요. 군대 갔다 와서 복직하려 했지만, 감원 바람이 불었어요. 비행장 일대와 송 정 앞들에 항만이 들어선다는 이유였지요. 나는 속으로 많이 안타까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군에 가기 전 저축했던 그 돈으로 동아식품'을 개업해, 짐 자전거 가득히 주문 식품을 싣고 북평과 송정 일대를 누비기 시작했지요."
북평해수욕장, 갯목 전경, 사진_동해문화원 DB
동해항 건설 전 송정 항공사진, 사진_동해문화원 DB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송정,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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