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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06. 2023

학이 노닐던 동해 송정, ‘송라8경‘?

11.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학비형국 송정,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송정그림지도, 사진_송정초등학교 60년 사

강원도 동해 송정의 지형은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형상이라 하여 '학비형국' 혹은 '학등마을'이라 불렀다. 또한 마치 개구리밥이 물 위에 떠 있듯 보인다 하여 '부평형국'이라고도 했다. 이런 송정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송정파출소'를 짓기(1960년) 위해 기초공사를 하던 중 석곽묘, 석도, 석축이 출토되었고, 동해항' 확장공사 때 1987년 발견된 지석묘 1기와 각종 유물, 그리고 동해 도로공사 때 1999년 확인된 움집 유적, 빗 살무늬토기, 동검, 구리창 등의 각종 고대 유적을 근거로 학자들은 '송정 마을 일대는 철기시대 때 약 1,400호가 거주했을 것'이라 발표했다. 이는 서쪽으로 우뚝 솟은 두타산과 청옥산이 찬바람을 막아주고, 전천 물줄기가 마르지 않는 비옥한 들판과 바다가 있어 집단 거주 마을을 형성했으리라 시사되었다.


송정 일대는 또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임을 여러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 중 '삼국사기'에 '눌지왕 34년 450년 7월, 고구려 국경수비대가 실직의 들판에서 사냥을 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는 발한 촌과 평릉촌 일대라고 삼척군지에 기록되었다. 이로 짐작건대 '실직의 들판'은 송정의 앞들이 틀림없을 것이다. 토박이 성씨인 삼척 김 씨가 주류를 이루며 살던 이곳에, 고려 말부터 각 거족들의 입향시조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강릉김 씨, 남양홍 씨, 영일 정 씨, 전주 최 씨, 강릉 최 씨, 삼척 심 씨, 김해 김 씨, 안성 이 씨, 전주 이 씨, 안동 권 씨, 강릉 박 씨, 금성 라씨, 영월 신 씨 등 각 씨족들이 이곳 송정으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한양과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정치인 남구만, 김양겸 등의 유배지로도 인식되었다. 그러나 삼척부사로 부임해 온 김효원. 허목, 이세필 등이 향교를 키워 향토 선비를 많이 배출하였다.

영호정, 사진_ 동해문화원 DB

일제강점기 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상, 도하, 견박면을 북삼면으로 통합했다. 인구가 가장 많고 부촌인 도하면 송정은 예부터 바닷가와 넓은 들판, 소나무가 많아 솔난곳이라 불렸다. 솔난곳은 또, 소나무가 무성하다는 뜻으로 '송라정'이라 불렸다고 '진주지'에 기록했다. 이 송라정의 정이 자연스럽게 정자 '정'으로 바뀌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관로변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늘이 많다 하여 '송음마을', 마을 동쪽에 있는 화랑호, 웃개, 아랫개 등의 호수가 있다 하여 '송호마을'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이렇듯 자연경관이 뛰어나 송천 최창억은 송라 8경을 지었다.

송라팔경

1경. 송라명월(松籮映月)

밤이 되면 마을에 달이 비치고

2경. 고암출일(姑岩出日)

할미바위 위로 아침 해가 솟네

3경. 구호수조(龜湖垂釣)

구호 호수에서 낚시 드리우니

4경. 양장방우(羊場防牛)

양치는 목동은 풀밭에 소를 풀어놓네

5경. 이촌쇄망(漁村曬網)

바닷가에서는 고기 잡는 그물을 말리고

6경. 사정관후(射亭觀帿)

정자에서 활을 쏘고 과녁을 보네

7경. 창파풍범(창파풍범)

넓은 바다 물결 위로 돛배는 바람을 타고

8경. 평사우로(平沙雨鷺)

넓은 백사장에는 비 맞은 갈매기가 노니는구나

송정은 이렇듯 뛰어난 자연경관 속에서 글을 읽고, 넓은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 바다와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며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해 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할머니들이 손자들에게 이상한 말을 전하고 있었다.

마을에 큰 우물이 생기고 엄청난 돌 거북이 뜨는 날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송정에 살다 보면 언제일지 모르지만, 마을 앞에 큰 우물이 생기고 바다에는 엄청난 돌거북이 뜨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송정을 떠나야 할 것이다."
북삼화학 용정사택, 사진_동해문화원 DB

이 예언의 전초는 '북평역'이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부족한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묵호에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세웠다. 즉 삼척탄광, 묵호항 축조, 북삼화학, 삼척철도인데, 이중 북삼화학과 삼척철도가 송정에 들어섰다. 한적한 농촌에 불과했던 송정에 갑자기 도계까지 놓는 철로공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용정 삼봉산 아래 터를 잡고 살아왔던 '향길댁' 고택이 헐리고 북삼화학 기초공사가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이 공사판에 일하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삼화체절소, 사진_동해문화원 Db

1943년은 삼화제철소와 삼화철산이 들어서자 북삼면은 공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해방이 되고 6.25를 겪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북삼화학 때문에 송정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절대적인 전력 부족으로 애를 태울 때, 물만 부으면 어둠을 환하게 밝혀주는 카바이드 때문이었다. 이 카바이드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북삼화학'에서 생산되었다. 또한, 전 국민의 등을 따습게 하고 밥과 반찬을 만드는 무연탄 탄광지대가 바로 이웃이 아니었던가. 그 무연탄을 열차에 싣고 묵호항으로 와서 하역한 후, 다시 선박에 선적하느라 묵호는 그야말로 검은 호수로 변해버렸다. 더구나 먹을 게 없던 시절, 일 년 내내 술안주와 허기를 달해주던 대표적인 주전부리가 오징어와 명태였다.


이 두 생선을 건조하는 덕장도 바로 묵호였다. 경제 사정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먹고 살만큼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송정에 있는 해수욕장에 가서 몸 한번 바닷물애 풍덩 담가보는 게 꿈이었다. 이렇듯 번창했던 송정이 어느 날, 할머니가 들려주던 예언이 맞아가기 시작했다. 드넓은 앞들 옥토가 사라져 큰 우물이 되고 돌거북이 시멘트, 석회석, 아연 망간, 유연탄, 무연탄가루를 싣고 가고, 싣고 와 온 동네에 분진을 날렸다. 송정의 반 이상이 사라지고,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야' 장사꾼들이 사라지고 역전은 하루가 다르게 썰렁하게 변했다. 탄광지대와 묵호항 또한 송정과 마찬가지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사람들은 십수 년간 사용했던 십 구공탄을 헌신짝처럼 잊고, 무진장 잡히던 오징어와 명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송정 출렁다리. 사진_동해문화원 DB

날아가던 학이 내려와 휴식을 취할 만큼 많던 소나무는 항만 개발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젠 선비와 고고함을 상징하는 학이 내려앉을 곳이 변해버린 송정은 천명을 다한 것일까. 지리적 여건과 정치권의 힘이 맛물린 항만 개발로 얻은 것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은 송정이 되었다. 송정이 고향인 사람은 추억을 공유해 단합된 모습을 구체화하고, 남아있는 사람은 가진 걸 더는 잃지 않은 게 송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송정,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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