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두타산 일기, 두타산기
명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글을 우리는 유산기遊山記 라고 부른다. 민족의 명산, 두타산 자락에 있는 국민관광지로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해시의 마지막 선물, 무릉계 일대의 유산기는 성암 김효원(1532~1590)의 '두타산 일기'와 미수 허목(1595~1682)의 '두타산기'가 대표적이다.
성암은 1577년(선조 30년)에 7일간 당시 삼척의 유생들과 함께 무릉계에서 기숙하며 절경을 즐겼다. 기록 형식은 일기체였다. 그는 삼척부사로 재직(1575~1578)하는 동안 '경행사景行祠'를 세우고, 삼척에 유학을 널리 보급하고 유생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암은 1577년 3월 20일 새벽, 삼척에서 출발해 고사리를 넘어 전천애서 유생들을 만나 파소, 호암을 거쳐 저녁때 중대사에 도착했다. 그 후, 엿새를 백련암, 반학대, 기표암, 무릉계, 용추, 거제사터, 천주암 등을 다니며 지명을 붙이고, 시를 짓고 토론을 벌이다 하산했다. 성암 김효원의 두타산 일기는 자연에 심취하고 풍광을 즐기는 데에 머물지 않고 심신 수양에 우선하였다. 특히 운韻에 맞추어 유샌들과 시구로 화답한 기가 17편이나 되었다. 시는 '유중대사사시권서'와 '성암유고'에 남겼다.
산중에서 겨우 닷새를 머물렀는데, 속새 생각을 떨치지 못하니 이 어찌 상계 극락에 머물 자격이 있겠는가?(중략) 아아, 정사政事를 돌볼 때에는 온갖 어지러운 정신으로 마음이 안정하지 못했는데, 산중에 들어와서 개연히 티끌 같은 세상의 온갖 잡사를 떨 치니, 저절로 착한 마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다시 마을로 되돌아가면 사람들의 원망은 점점 많아질 것이고 아전의 보고는 더더욱 번거로울 것이니, 이는 마땅히 할 일이나 또한 심기가 불편하고 어지러울 뿐이다. 영동지방 산수 중에서도 기묘한 겨치로 이름난 곳은 금강산이 제일이고 그다음이 두타산이다.(중략) 두타산은 삼 척부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골짜기의 깊숙함과 수석의 기이함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지 오래되었다. 올해 봄에 내가 공무에 지친 나머지 한번 속세를 벗어나 심신을 깨끗이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삼척의 유생들과 더불어 두타산을 찾기로 약속하였다. (중략) 내 몸소 산에 들어가며 높고 낮은 곳을 오르내리는데, 산길이라고 하는 것이 한결같이 않았다. 오를 때는 힘이 들고 내려올 때는 편안한 이치가 여기에도 있었으니, 이른바 선을 좇는 것은 가파를 계단을 오르는 것과 악을 좇는 것은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
미수 허목은 나이 60세(1660)에 삼척부사로 왔다. 눈썹이 길어 눈을 덮는다 하여 호를 미수라 하였고, 많은 업적을 삼척에 남겼다. 이 중 고전서로 쓴 '동해척주비'는 조류를 퇴치하는 '퇴조비'인데 액을 쫓는 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척주지'를 편찬하고 향약을 만들의 민초들을 교화하였고, 죽서루를 보수하고, 수리관개 시설에도 힘을 썼다. 그는 좌천되어 삼척부사로 부임됐지만, 두타산을 다녀온 후 그 절경에 도취하여 '두타산기'를 남겼다.
“6월(1661년)에 두타산으로 갔다. 삼화사는 두타산의 오래된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어 연대를 알 수 없고, 우거진 가시 덩굴 속에 무너진 탑과 철불 만이 남아있었다. 산중으로 들어가니 계곡 위로 우거진 소나무와 큰 바위들이 있는데, 바위너설(삐죽삐죽 나온 곳)이 긴 여울에 마주 보며 층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을 '범바위; 라 하고, 층대를 따라 서쪽의 벼랑바위로 올라가면 '사자정'이라 했다. 계곡 위의 작은 고개로 오르면 바위벼랑 밑에 맑은 물과 흰 돌이 있는데, 그 일대 반석을 '마당바위'라 불렀다. 바위로 된 계곡이 확 트였고 돌 위로 물리 흐르는데, 맑고 얕아서 건널 수가 있다. 석양이 비끼면 소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마당바위를 어떤 사람들은 '산중 사람들이 바가지를 버렸던 바위;라고 말했다.
북쪽 벼랑에 있는 석대를 '반학대'라 했고, 이곳을 지나면 산 일대가 전부 암석인데, 쭈뼛한 바위가 깎아 세운 듯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앞에 있는 미륵봉은 더 기묘했다. 마당바위를 지나 서쪽으로 가면 중대사가 있었는데, 지난해 산불로 인하여 일부 타버린 것을 산승이 삼화사로 옮겨지었다. 삼화사는 제일 아래에 있고 중대사는 산 중턱에 있었는데 그곳은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서 사장 아름다은 절이었다. 절 앞의 계곡을 '무릉계'라 했는데, 산중 수석의 이름은 모두 삼척부사이었던 김효원이 지었다. 김 주사의 인정과 덕화는 지금까지 전해지며 부 안에는 그의 사당이 있다.
북쪽 폭포는 중대사 뒤에 있는데, 바위너설로 된 골짜기가 몹시 험하고 가파르며 그 아래는 산과 바위가 평탄하여 내려갈수록 험한 바위가 없어 놀기에 적합했고, 계곡의 물로 흘러내렸다. 바위너설 위호 일백 보쯤 가서 중대사를 지나면 바위 벼랑을 더위잡고 기어오르게 되는데, 두 발을 함께 디디고 갈 수가 없다. 학소대에 가서 쉬었는데, 이곳의 산세는 더욱 가파르고 쭈뼛하여 해가 높이 솟아올랐는데도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이기 낀 바위에 걸터앉아 폭포를 구경했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를 '천주암'이라 했고 앞산 봉우리에 학의 둥지가 있었지만 60년 전부터 학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산'에서 절경을 구경하였다. 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에 옆으로 동굴이 있고, 그 속에 마의노인이 쓰던 토상이 있고, 남쪽으로는 옛 성이 보였다. 북쪽 산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길이 끊어져 올라갈 수 없고 동쪽 기슭의 바위 봉우리는 깊은 못이 있는 곳까지 와서 멈추었다. 동북쪽의 다음 봉우리는 동으로 뻗었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와 바위 기슭이 되었는데, 검은 바위의 북쪽 벼랑과 마주 보고 있는데, 드 속에서 계곡물이 흘려 나왔다.
또 서쪽으로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못 위에 있는 봉우리와 함께 솟았는데, 가장 서쪽에 있는 것이 제일 높았다. 그 위쪽에는 우묵하게 들어간 바위가 있는데, 이끼는 오래되었어도 물은 맑게 흘렀으며 한자 남짓한 노송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봉우리를 세 발자국만 옮기면 올라갈 수 있으나 아슬아슬하여 굽어볼 수 수 없고, 나란히 설 수도 없었다. 한가운데 봉우리는 바위가 세 겹으로 포개져서 한 발만 내디디면 흔들렸다. 그래서 이름을 '흔들바위'라 불렀다.
그 밑에는 깊은 물리 있는데, 항아리 같이 생긴 넓은 바위가 구렁 전체를 차지하였고, 가운데는 물이 고여, 깊고 검어서 굽아볼 수가 없었다. 날이 가물 때는 여기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했다. 이 물줄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옛날 상원암의 황폐한 터가 남아있다. 어떤 이는 거기를 '고려 대 이승휴 산장'이라 말했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와서 마당바위의 저녁 경치를 더 보태 기록하고, 학소대의 아침 경치도 덧붙여 기행 했다. 6월 3일 미수가 쓰다. “
미수는 심신 수양이나 미학보다는 주로 지리에 관심을 두고 두타산을 기행 했다. 다녀온 곳의 지명과 경관을 사질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삼화사의 화를 '花'자로 썼다. 또 삼화사도 '절은 폐사되어 가시 덩굴이 무성하고, 탑과 철불만 남아 있다.'라고 묘사했다 이어 호암, 사자정, 반석을 '마당바위'라 적고 주변풍광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마당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과 암각서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반학대와 미륵봉을 묘사하며 중대사가 불이 나 터만 남았지만 '그곳은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 가장 아름다운 절이었다.'라 묘사했다.
또, 김효원이 산중 수석의 이름을 지었고, 학소대 주위의 산봉우리가 기암괴석으로 위용을 뽐낸다고 묘사했다. 미수는 학소대에서 학이 살지 않는 것에 아쉬워했다. 지조산에 지금은 '관음암'이 있고 철물구조로 된 구름다리와 하늘문이 있는데 '줄사다리를 딛고 올라갔다.'라 묘사했다. 마의노인이 있었다는 동굴은 지금도 남아있고, '남쪽으로는 옛 성이 보였다.'의 성은 두타산성이다. 문간재에 있었단,ㄴ '흔들바위 동석산성'은 아쉽게도 지금은 없다. 해방 이후 벌목꾼이 나무운반에 걸림돌이라며 훼손해 버렸기 때문이다. 미수는 또, 상원암의 옛터에 대해 '고려 대 이승휴의 산장이었다.'라 기록했다. 임진왜란 대 수많은 의병과 민간인이 혈전을 벌렸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삼화,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두타산의 문화_ 동해문화원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