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동해의 남쪽 봉정마을, 꾀꼴 집 이야기!
동해의 남쪽, 따뜻하고 고요한 봉정마을 중심에는 택호가 '꾀꼴 집'인 한옥이 있었다. 품위 있고 따뜻한 모습이 마치 집 떠난 자식을 한아주는 어머니 품 같다. 한옥 뒤로 대 나무 밭이 감싸고,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 사우와 천인정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다. 천인千仞은 '봉황이 천 길을 높이 날면서 먹이를 먹고 싶어도 일부러 내려와 조를 먹지않는다.', '봉비천인기불탁속鳳飛千仞飢不琢粟'에서 인용한 말이다. 선비의 지조와 기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로, 가은 홍재문이 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즐겨 쓰던 말이었다. 아직도 명절 찰 때면 경향 각지에서 모인 후손들이 종갓집 사우 앞단에 도열해 조상께 절을 올렸다. 대밭으로 둘러싸인 사우는 유림 가문의 상징이었다. 가은 선생은 농사보다 삼척향교를 출입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 정성을 더했다.
가은의 자 홍종환은 부친과 달리 농사에 매진했다. 집 앞은 사시사철 샘이 솟는 무논이라 미나리와 왕골을 심었다. 봄에는 미나리를 다듬어 장에 팔고 가을에는 왕골로 돗자리를 쳐 높은 값으로 팔았다. 또 사시사철 푸른 집 뒤의 대나무로 삿갓과 바구니를 엮고 안주인과 딸, 며느리들은 삼을 삼아 가용에 보탰다.
꾀꼴 집 막내딸로 자랐던 홍순남이 자서전 '나는 행복해'에서 조부와 부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우리 조상님은 대대로 과동에서 사셨는데, 봉정으로 이사 온 것은 할아버님의 선친(홍병표) 때였다. 할아버님을 홍선비, 홍학자라 불렀는데, 나의 시아버지 되시는 김세영(4대 북삼면장) 동생분인 김시영, 구호의 홍순창(전 북평초등학교 교장)씨 등 많은 분들이 서당에 다니셨다. 당시 북삼면 내외에서 학문을 한다는 분은 모두 우리 집에 모이시니, 하루에 여러 번 밥상을 차려야만 했다. 조선총독부가 민족말살 정책을 펴니 북삼면 유샹들이 여기에 대비하여 마음을 합쳐 '금란계'를 만들었고, 조부님은 계수로 추대되어 유림의 힘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문생계를 조직하여 기일이 되면 과동 장치에서 제례를 올렸다. 조부님이 전형적인 선비이신데 반해 아버님(죽포 홍종환)은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는데 큰일을 하셨다. 초가집을 헐어 12칸짜리 한옥과 행랑채를 지으셨다.(1934). 또, 집 뒤의 대나무 밭 오른쪽에 사우를 지어 사람가문의 모범을 보이셨다. 기제사는 사랑방에서 지내고, 명절 차례는 사우 앞에 장석(짚으로 길게 만든 자리)을 펴고 남자들은 자측에 여자들은 우측에 서서 절을 하였다.
아버님은 일 년 내내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일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놓지 않고, 지독하게 일을 하신다 하여 '땡삐'라는 별명을 얻으셨다. 북평장이나 맹방에서 문중 일을 보고 집에 오시면, 평복으로 갈아입고 대나무밭으로 가셨다. 묵은 대를 골라 적당한 길이로 잘라 1cm 넓이로 쪼개어 청색, 백색 색을 맞추어 삿갓을 만드셨다. 예전에는 우산이 없어 삿갓이 농촌의 필수품이어서, 장에 가져가면 날개 달린 듯 팔렸다. 집 앞 논은 무논이라 반 이상에 미나리와 왕골을 심었다. 미나리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논물을 찰랑찰랑하게 정리하여 줄기를 얹어놓으면 뿌리를 내려 월동했다. 새봄이 되면 미나리가 제일 먼저 싹을 피웠는데, 매장마다 줄기를 잘라 단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미나리 작업은 단오가 되기 전에 끝났다. 그러면 다시 논 정리 후 황골 모종을 심었다. 왕골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 8월 말이면 배었다. 대, 중, 소 길이대로 나누어 단을 묶어, 식구 모두 대나무 칼로 찢어 건조했다. 아버님은 마른 왕골로 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돗자리를 짜셨다.
아버님은 이렇듯 솔선수범 부지런히 일하셨는데, 식구 중에 어느 누구라도 일을 게을리하면 불호령을 내리셨다. 가을에는 커다란 감나무의 감을 따다 정성스레 곶감을 만들었고 제삿날이 되면 손수 밤의 껍데기를 벗겨 제기에 쌓으셨다. 아버님 손에는 늘 돗자리 칠 때 쓰는 노끈을 꼬았고, 일손이 빨라 농사일 중에 제일 어려운 조밭메기에, 똑같이 시작해도 다른 사람들 보다 두 골을 앞섰다. 이렇게 유별난 아버님과 평생을 같이 하신 어머님은 송정의 강릉 최 씨 진골집에 시집오셨다. 조카가 서예가로 명성을 떨리 최중희 씨였다. 어머니 친정은 무척 엄해, 옆집의 친구와 이야기를 할 떼도 울타리의 구멍을 통해 속삭이듯 말하셨다고 했다. 시집 올 때, 친정보다는 덜 하겠지 기대했는데 선비 시아버님에다 일만 하는 남편 때문에 더 힘들었다. 어머니는 내가 여고를 다닐 때, 매달 꼭 정한 날에 돈과 붓으로 쓰신 장문의 편지를 동봉해 보내셨다. 내가 구미마을로 시집을 가자, 막내딸이 보고 싶어 찾아왔지만 사돈이 어려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시고 돌둑 빨래터에서 한참 기다리다 돌아가실 정도로 막내딸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셨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조력으로 이버지는 매년 농토를 사고, 살림을 일으켜 세우셨다.
부모님은 슬하에 4 남 3녀를 두셨는데, 자녀교육에 대하여 뚜렷하고 확고한 방침을 가지고 계셨다. 장남(홍순동)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시켜 가사를 돌보고 종손으로 종가를 이어가게 하셨다. 신학문이 도입되고 학교가 생기자 차남인 순철 오라버니부터 신교육을 시키셨다. 조부님은 어렸을 때부터 '순철이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은 안다.'라고 늘 말씀할 정도로 명민하여 춘천농고에 진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5학년 졸업반을 앞두고 여름 방학 때 결혼하고, 강원도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순철오라버니 앞길은 탄탄대로이고, 새로운 생활에 접하리라 여겼다. 할아버님도 그 해 봄, 눈을 감으면서 이 기쁜 소식에 미소를 띠며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순철 오라버니가 고귀한 꽃봉오리를 피우지도 못하고, 다 시 못 올 길을 가시다니(1980년) 오 호애 재라! 오라버니는 졸업을 앞두고 집으로 내려오다 급성독감에 걸렸는데, 집에서 닷새 동안 온몸이 달아올랐다. 당시 병원이 없어 한의원에서 진맥을 한 후 침을 맞고 한약을 복용해도 낫지 않아, 무당까지 불러보았으나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온 집안 이 슬픔에 잠기고 말았다. 아버님은 남편 사랑도 못 받고 젊은 나이에 홀로 살아야 할 며느리 걱정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순동 오라버니는 집안을 일으킬 동생의 죽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꽃다운 나이 19살에 둘째 형님은 한평생을 홀로 살아가야만 했다. 훗날 내가 결혼한 후, 시누이 남편(김진만 국회의원)의 누님이라 오랜 세월 더 각별하게 지냈다. 형님은 조카 화식이를 양자로 받아들여 사셨지만 평생을 홀로 지내서야 만 했다."
죽포는 아버님에 이어 집안을 일으킬 차남마저 세상을 하직하자 큰 시름에 빠졌다. 정신을 차려 대나무밭 남쪽에 집을 지어 둘째 며느리를 분가시켰다. 당시 풍습은 양갓집 규수가 재가하는 것이 허용이 되지 않았다. 죽포는 또, 문중회의를 거쳐 초가집을 혈고 12만 한옥을 짓기로 했다. 인근에 사는 일가친척 모두 집 짓는데 동참을 했다. 2년에 걸쳐 봉정 중촌에 공사를 벌였던 한옥이 완공되자, 종갓집의 위용이 드러났 다. 숨죽이며 한옥 짓는데 동참했던 장남 순동은 집이 완공되자. 부친 앞에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아버님,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시대지만 적의 한 복판에서 그 모든 것을 알아야 나라도, 우리 집안도 더 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유학을 허락해 주십시오." 죽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소 판 돈을 장남 앞에 놓았다. 이미 그때 순동 은 10살 먹은 장남 과 2살이 된 차남 맹식 사이 있었다. 순동은 대학교를 졸업했을 24살 나이로 일본 유학을 단행했다.
꾀꼴 집의 둘째 사위이며 필자가 2004년 동해문화원 사무국장 공개채용 당시 문화기획자로 추천을 해주신 <동원 김영기 선생님>은 향토사 '분토기 2에'아름다운 탈출'이란 제목 아래 1920년대 어느 농촌 마을 이란 부제를 달아 홍순철의 죽음과 홍순동이 유학 갈 당시의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순동의 슬픔에는 남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한 가정의 장자이며 종갓집 종손인 그는 종택과 문중에 대한 책무가 양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가풍과 유가의 전통성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아우 순철에게 희망을 걸지 않았던가! 순철이를 보낸 현실은 혼돈할 따름이었다. 눈을 감으면 거짓된 헛것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순동은 이 혼돈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순철이가 이루지 못한 길을 찾아보는 것이 이 혼돈을 떨쳐내는 첩경이라 여겼다. 순동의 그 첫 결심으로 나는 오늘 상투를 자르는 것이다 라 여기고 마을 이발사에게 기별을 했다. 상투를 자르는 순간이 진행되었다. 과거를 닫고 현재를 발판으로 미래로 도약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슴 앞을 가린 보자기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 무엇과 작별하는 아쉬움의 눈물인가? 상투가 마지막으로 잘리자 순동은 두 손으로 잘린 상투를 감싸 쥐었다. 손에 든 상투를 바라보는 순간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순동은 상투를 보자기에 싸들고 사우의 조상에게 고했다. '죄송합니다. 불효막급이옵니다! 이어 부친 앞에 절을 올렸다. 부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수일 후 부친도 상투를 자르셨다. 먼 길을 가는 장남의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였다. 진실된 아비와 자식 간의 따뜻한 정이었다. 순동은 이별의 눈물 속에서 헛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는 자신을 발견했 다. 더 깊고 넓은 세계를 알기 위해 한 순간도 머뭇거릴 수 없었다.
변화의 물결은 날로 거세어졌다. 그는 순철이가 걸었던 변화의 중심에 서서 신학문을 접해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일본의 중심, 동경이었다. 출생 후 24년 동안 배우고 익힌 글과 말은 한문과 한글, 성현의 말씀뿐이었다. 생활규범은 형식적이고, 진취성과 개혁을 적으로 규정하는 유교의 틀에서 살아왔을 뿐이었다. 학교 문전에도 가본 일 없고, 일본말 한 자도 몰랐다. 오직 사림 집안에서 글을 읽고 농사만 지어왔는 데, 이제 그 속에서 탈출이었다. 아버지는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오너라'. 어머니는 '건강히 다녀오시게'. 아내는 '애들 직정은 말고 열심히 공부하세요. 동생 순하, 순장이 눈물짓자'내 자리 잡으면 너 희를 부르겠다. 그때까지 부모님 잘 모시고, 조카들도 잘 돌봐주라며 이별을 고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승객들 틈에 끼어 관부연락선을 탔다. 승객은 일본 옷을 입은 사람이 대다수였고, 한복 입은 승객은 몇 평뿐이었다. 밤 8시 연락선은 길게 고동을 울리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 다. 순동은 이제부터 현재를 떠나 미래를 항해하는 뱃전에서 넘실거리는 파도를 노려보다 하늘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크고 작은 별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빛나고 있었다."
홍순동은 동경에 도착하자 먼저 유학을 온 처남을 찾아갔다. 처남 주선으로 독학을 해 일본어를 터득한 후 전수학교,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동생들과 약속을 지켜 불러 1982년 동경제과학교, 순창을 불러(1938년) '전기학교'에 공부하게 했다. 이어 장남 윤식을 불러 공업학교에 여동생 순옥을 불러 양재학교에 보냈다. 순동은 장남 역할에 충실히 했지만 정작 애초에 다짐했던 더 넓고 깊은 세계로의 체험은 아쉬움이 많았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태평 양전쟁으로 일본의 중심 동경은 혼란이 가중되어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다. 더구나 고향에서 부친이 장남의 안위가 걱정되어 귀국을 종용했다.
결국 1939년에 일시 귀국했다가 1943년에 동경생활을 청산하고 귀가했다. 삼척개발(주)에 입사해 장성탄광에서 근무 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 방 후에는 건동중학교와 북평중학교에서 한문교사로 재직했다. 장남 윤식은 귀국 후 공무원과 회사원으로 살다, 장년에 귀향해 종갓집을 지켰다. 차남인 맹식은 아버지 꿈을 이루기 위해 춘천사법, 동국대 법대에 진학했으나 6.25로 인한 난국으로 꿈을 접고 교사로 전향했다. 막내 화식도 연세대를 나와 교사와 학원을 운영하며, 혼자 지내는 양어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순동이 이루고자 했던 꿈이, 다행히 조상의 음덕으로 손자 대에 이르러 결실을 맺게 되었다. 맹식의 4남 중 장남인 지훈이는 어렸 을 때 몸이 약해, 할아버지 순동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척추질환이 심해지자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하여 자신의 뼈를 손자에게 이식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지훈은 이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꿈도 함께 이식받았는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 후 판사로 임용되어 마산, 원주, 서울고등법원에 근무하다, '강릉 지원장'을 역임한 후.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차남 지인은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외무고시에 합격해 캐나다 총영사,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삼남 지헌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이비인후 병원을 개업, 운영하고 있다. 사남 지만도 연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사법고시에 합격해 건설회사 전문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4 형제 모두, 오늘날의 복이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의 음덕이라 여기고, 특히 94세가 되신 어머니(권순자)의 교육에 대한 열정 덕이라 여기고 있다.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북평 2018,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