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Catkr Aug 07. 2015

어느 아마추어가 만난 <PD수첩>

취미로서의 사진은 때때로 아주 지겨울 만큼의 소재 빈곤을 동반하기도 한다. 좀 더 쉬운 말로 써볼까? 뭘 찍어야 할지를 모른다. 차라리 누군가 나한테 숙제라도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 그 무렵이었다. 예전에 사진을 자주 찍으러 다녔던 한 아는 후배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혹시 사진일 해볼래요?”
소개받은 편집자는 알고보니 동문이었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 부담없이 작업 계획을 시작했다.  Apr. 2010, TX, Seoul

나도 한 때는 아르바이트로 사진일을 하고 다녔다. 과외보다 벌이가 더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직업사진가’라는 이름이 그런 수입의 차를 상쇄해줄 만했다. 전국에 퍼진 노래방 때문에 전 국민이 노래를 잘 부르듯, 카메라도 기하급수로 퍼졌고 전 국민이 이제 웬만한 사진은 다 찍을 줄 아는 시대라, 사진으로 정기적인 수익을 내는 자리는 더욱더 특별해 보였다. 당시 냉큼 집어 든 일은 광고사진이었는데 나는 스튜디오 사진에 큰 흥미도 자신도 없어서 주로 실외 광고사진일을 했다. 그 시절은 참 고단했다. 해가 떠있는 내내 사진을 찍으러 다녔고 밤에도 쉬지 않고 집에서 사진 편집을 했었다. 그날 찍은 사진이 모두 당시의 사장님한테 OK 사인을 받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었다. 혹시라도 몇 장이 퀄리티나 소재 문제로 거부당하면 다음날 재촬영을 나가야 했다. 물론 원래 그날 찍어야 했던 분량도 해야 했으니 더욱 시간에 쫓겼다. 그렇게 일이 중첩되니 더 힘들었지만 내가 자초한 저품질 사진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게 우리가 '프로답다'라고 부르는 직업 정신 아니던가. 

실내 사진일의 상당수는 사실 육체 노동이다. Apr. 2010, TX, Seoul

후배의 제안을 들었을 땐 이런저런 이유로 사진에 대한 열망이 다소 떨어져 있었던 상태였다. 새로운 일이라는 이야기에 덜컥 물어보니 MBC <PD 수첩>의 PD 사진을 찍어달라는 주문이었다. 알고 보니 MBC <PD 수첩> 20 주년을 기념으로 <PD 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이란 책을 발간하는 데, 책 속 안에 삽입될 PD들의 사진, 특히 그들의 바쁜 모습을 찍어달라는 주문이었다.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다음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근데 지금 MBC 파업이래요”
PD수첩 사무실과 책상들은 다소 비어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집에 있는 내 책상이 더 복잡해보였을 정도였다. Apr. 2010, TX, Seoul

파업인데 바쁜 PD들의 모습을 어떻게 찍어야 할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 일요일 경에 시간이 돼 직접 강남 쪽에 있는 책 편집자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편집자는 사진 기술 관한 선입견 같은 것은 없었다. 미팅 전에 전화로 참고할만한 책과 삽입 사진을 알려줬는데,  그중 하나는 <대담>이라는 책이었다. 편집자는 거듭  <대담>의 삽입 사진을 참고해달라는 말을 했는데, 편집자를 만났을 때 본 <대담>의 삽입 사진은 나를 다소 긴장시켰다. 책을 넘겨보니 사진을 찍은 사람이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로 유명한 이상엽 작가였다. 클로즈업 사진들은 매우 정교했고 진중한 책의 분위기와 딱 떨어지는 게 프로답다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였다. 편집자에게 이런 사진들을 원하냐고 했더니, 편집자는 준비 중인 그런 너무 주관적인 느낌이 나는 사진 보다는 조금 더 ‘열린’ 사진을 원한다고 했다. 속으로는 그런 접사가 가능한 렌즈도 없고 이상엽 작가의 사진이 워낙 좋은 편이라 비교를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속으로는 조금 환호했다. 당장 편집자가 불만족에 가득 차 내 사진을 계속 퇴짜 놓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편집자는 나에게 PD들의 물건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일종의 기호로서 그들을 표현해줄 사물들을 카메라로 담아 달라는 주문이었고, 그런 접근방식이 다소 이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편집자가 나에게 거듭 괜찮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질문에 대다수의 돈 없고 모델 없는 진지한 아마추어답게 나는 대답했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전문가입니다. 무생물 사진 전문가”'
'PD수첩'이라고 따로 진짜 PD용 수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국PD연합회에서 PD수첩이라는 걸 나눠준다는 것 정도? Apr. 2010, TX, Seoul

나는 몇 가지 내 옛 작업 샘플들을 보여주고 사진 톤이나 분위기 등을 미리 조율했다. 그 와중에 책상에 놓인 비공개 상태인 원고를 봤지만 내가 반출해서 읽게 되면 본의 아니게 유출 문제를 야기할까봐 원고를 읽지 않겠다고 했다. 책에 들어갈 삽입 사진을 촬영하면서도 책 내용을 잘 모른다는 건 분명 그건 꽤나 큰 모험이었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만난 PD들이 낯선 만큼 흥미로운 모습들을 나 스스로도 더 잘 찾아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심지어 그런 이유를 핑계 삼아 촬영지 선행 답방도 하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일부러 어지럽고 바쁘게 보이는데 쓰일 별도의 소품도 들고 가지 않기로 합의했다. <PD 수첩> 책인데 그렇게까지 위장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을까?


촬영 당일이 다가오며 떠오른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파업이었다. <PD수첩>을 촬영하는 스튜디오 역시 파업 때문에 찍을 수 없었고, 파업으로 PD 들은 제자리에 있지 않았으며 당연히 평소보다 덜 바빠 보였다. 편집자의 계획도 완전히 바뀌어서 소품 위주의 사진이 아닌 개별 PD의 얼굴을 찍어달라고 나에게 주문했고, ‘무생물 전문가’는 그 통에 전업을 해야만 했다. 


편집자와 함께 MBC 건물 내 <PD 수첩> 팀 자리에 찾아간 난 어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주 전형적인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고질병, ‘후천성 서성증후군’이었다. 때때로 정말 뻔뻔한 사람들은 완치된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진을 찍기 위한’ 제대로 된 신분 따위는 없는 나로선 PD들에게 포즈를 취하라고 구체적인 '반강제적인 명령'을 내리기엔 뭔가 껄적지근한 느낌을 마음에서 지울 수 없었다. 다들 한참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고 탐사보도의 선두에 있는 사람들이라 더더욱 그런 부담은 심했다. 파업 중이긴 했지만 다들 나름의 작업들을 하고 있었기에 왠지 내가 방해한다는 느낌이 들까 싶어 접근은 더더욱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내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인터뷰어였으면 좀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잡아보려고 편집자는 만나는 PD마다 책에 대해서 설명을  차근차근해주었고 그 사이에 나는 PD 들을 관찰하고 촬영할 수 있었다. 당시 MBC내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뻣뻣한 PD들의 얼굴에서 누군가는 꼭 소통의 시작을 풀어냈어야 했는데, 편집자의 직업 정신은 그런 뻣뻣함을 꿋꿋이 녹여냈다. 그렇게 본 PD 들을 모습을 아래에 짧게 옮겨본다.


그 날은 최승호 PD가 검찰 스폰서건으로 인해 협박 전화를 받은지 며칠 안 되는 날이었다. Apr. 2010, TX, Seoul

마침 그 날은 최승호 PD가 검사로부터 협박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날이었고, 최승호 PD 역시 지방 출장 때문에 바쁜 때라 과연 얼굴을 뵐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였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더욱 과묵해 보이는 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진실되게 일한다는 인상이 한 눈에 드러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주: 후에 최승호 PD는 탐사보도 독립언론인 뉴스타파를 운영하게 된다.)


송일준 PD, Apr. 2010, TX, Seoul

송일준 PD는 광우병 사건 때문에 법정 싸움을  계속하던 중이라고 했다. 그런 통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느 PD보다도 밝은 모습이었다. 난 촬영 장소가 좀 더 복잡스러운 곳이 좋을 것 같아 편집실로 안내해달라고 요청했다. 편집실은 테이프가 가득했고, 어둑하며 침침했으며 오래된 CRT 모니터들이 컬러바들을 유치한 색으로 뿜어댔다. 가장 PD스러운 공간이라 그런가. 다른 사진들보다 송일준 PD의 사진이 자연스러웠다. 이미 송일준 PD는 그 상황에 천연덕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지긋지긋한 공판에 어느 정도 힘이 빠져 자연스러웠던 걸까. (주: 후에 재판 결과는 무죄로 판명 난다.)


윤길용 PD, Apr. 2010, TX, Seoul

윤길용 PD를 만나기 전 편집자는 대화가 쉽지 않을 거라고 나에게 주의를 줬었다. 사전에 편집자가 연락했을 때도 협조를 받기 어려웠다고 했다. 내가 본 윤길용 PD는 아주 섬세해 보였는데 한올 한올 빗은 것 같은 머릿결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대변하는 것 같았다. 훗날에 책에 쓰여진 윤길용 PD 부분은 그는 사이비 종교를 주로 취재했기에 그가 얼마나 사람들을 쫓았고 또 광신도들에게 쫓겨왔는지 서술하고 있었다. 그는 그래서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더 신중해 보였고, 나와 내 카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환균 PD, Apr. 2010, TX, Seoul

김환균 PD는 아주 상쾌해 보였다. 비록 그날이 파업일이었지만 상대하기에 기분 좋은 그런 편안한 사람이었다. 배경을 바꿔야 해서 어디론가 가긴 가야 했는데, MBC 건물 내부 인테리어가 거의 다 비슷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결국 옥상에 잠시 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은 좋았지만 사진이 엉망이었다. 인물사진에 좋다는 흐린 날씨였지만, 내 생각도 흐려진 때였다. 간신히 뒷배경을 잡고 아주 일상적인 사진을 찍어버렸다.

김윤영 PD, Apr. 2010, TX, Seoul

김윤영 PD는 <PD수첩>을 처음 기획한 사람이다. 촬영 협조 요청을 들은 김윤영 PD는 눈 치료 후에 얼굴이 달라져 보일 수 있다고 했고, 난 서둘러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치료가 시작되기 전에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김윤영 PD를 만났다. <PD 수첩>의 날카로운 이미지와 달리 그는 어딘가 모르게 서툴러 보일 정도로 마음이 넉넉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이 원래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연배에 어울릴만한 부드러움이 있었다. 김윤영 PD만이 촬영 중 필름으로 촬영하는 내가 신기한지, 무슨 카메라를 쓰는지 나에게 물었었다. 좋은 카메라가 벼슬은 아니지만, 분명 나를 자세히 살펴볼 만한 마음의 여유는 이 분만이 갖고 있었다. 


최진용 PD, Apr. 2010, TX, Seoul

최진용 PD는 잠시 파견으로 지상파디지털전환추진협회 사무총장으로 재직 중이라  따로 찾아뵈어야 했다. 창밖은 비가 와 어둑어둑했고, 실내외의 노출차도 적어 나름 좋은 배경이지 않나 싶었다. 나는 커튼을 접어달라고 부탁했고 이런 드라마틱한 조명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김보슬 PD, Apr. 2010, TX, Seoul

당시 김보슬 PD는 임신 중이었다. 다른 PD 들은 임신 때문에 부어버린 얼굴, 살이 찐 몸이 김보슬 PD의 평소 모습과 영 달라 사진을 찍기에 알맞지 않은 때라고 말을 던지고 가곤 했다. 김보슬 PD 본인마저 걱정하기에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고, 이내 곧 결정을 내렸다. 의자에 올라 사진을 찍어서 얼굴 윤곽을 날카롭게 하고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문틀로 가렸다.


내가 배경지식도 없이 덜컥 찍어버린 PD들의 사진과 내  첫인상은 그랬다. 그들은 일반인에 비해 카메라에 떳떳했다. 어느 아나운서라도 그랬었겠지만, 직업적인 태도라고 하기엔 모종의 심지가 있는 모습이었다. 이 글에서 그들이 어떻다라고 언급하기엔 단 하루 만난 게 다인지라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다. 다만 난 내가 느낄 수 있는 뷰파인더 속  첫인상만을 간략히 적어봤다.


훗날에 편집인을 다시 만나 물어보니 책이 꽤나 잘 팔렸다고 했다. (참고: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293209) 나도 뭔가 기여를 한 듯 싶어 기분이 좋았지만, 한참 시간이 지나고 보니 PD수첩이란 공든탑은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는 나의 기록이 그 공든탑의 유적으로서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흑백 사진을 왜 찍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