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작「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읽고
동두천 거주자가 전철을 타고 서울을 이동 할 때 좋은 점이 딱 하나있다. 바로 앉아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것. 아니다. 좀 더 정확히 하자. 장시간 앉아서 갈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내가 전철을 타는 경우는 상당수가 서울을 가기 위해서다. 이쯤에서 전철로 이동하는 서울에 대한 정의를 할 필요가 있다. 동두천에서 전철 이동 시 가장 근거리 서울 소재지는 도봉산역이다. 허나 도봉산역을 서울이라고 하기엔 모양과 느낌이 안 난다. 마치 이런 느낌이다. 예컨대 AM12:01분경에 술자리가 끝나서 서로 인사를 나눈다고 치자. 누군가가 ‘오늘 즐거웠어’라고 할 때, 분명 시간상으로는 어제 일이지만 다들 오늘로 통용한다. 거기서 누가 ‘나도 시간상 어제 즐거웠어’라고 하면 어색하다. 이처럼 도봉산 정도를 가는 걸 가지고 서울 나간다 하기에는 모양이 안 선다. 적어도 성북구 정도는 가줘야 비로서 서울로 입성한 느낌이 든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 1시간 정도를 전철 속에서 보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 책을 읽으면 왠지 공돈 번듯한 느낌이다. 여기에 멋을 좀 내보자면, ‘전철은 내겐 교통수단이면서 독서수단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솔직히 전철에서는 책을 집중해서 읽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전동차 내에서 화개장터가 열리는 것이 허다한 1호선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을 만나면 내릴 곳을 지나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주로 귀가 할 때 이런 현상이 생긴다. 원래 내리는 곳은 동두천중앙역이지만, 차마 책을 접을 수 없어서, 종착역인 소요산역에서도 책을 펼친 채 객실에 앉아 있는 것이다.
최근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8월 초에 김중혁 작가의 신작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읽으면서 그랬다. 이날도 서울에서 들어오는 길이였다. 의정부 정도에서 소설집 표제작인「가짜 팔로 하는 포옹」다 읽었다. 무척 좋았다. 너무 좋아서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종착역인 열차가 소요산역 도착했고 승객들이 모두 내렸다. 객실 내 스피커에서 몇 시 몇 분에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객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하여 중앙역에 도착하기 전에야 마침내, 책장을 덮었다. 그 순간의 느낌이 오롯하게 남아있다. 그 이유는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을 다 듣고 너무 좋아서 바로 ◀◀ 표시를 눌러 한 번 더 듣는 거처럼, 연속해서 단편 소설을 읽은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두 번째 읽을 때, 첫 번째 보다 찬찬히 읽을 수 있었다. 처음 읽을 때는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며 걷는 것처럼 소설의 이야기만 따라 갔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걷는 것처럼 읽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술’ 이라고 생각한다. 술에 대해 묘사하고 표현한 부분을 마치 눈으로 술을 마시듯, 입속에 와인 한 모금을 머금는 것처럼 읽었다.
다시 전철 상황으로 돌아가자. 역에서 내린 다음 가까운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샀다. 소설의 문장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몸이 붕 뜨고, 무중력 상태를 체험하는 것 같다.’
술을 마시면 잡고 싶은 게 없어져. 땅 위에 붙어 있는 게 다 의미 없어 보이고, 다 놓아 버리고 싶고 그래.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자, 여기 술잔을 잡아봅니다. (중략)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 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맺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요, 술을 마십니다.’
이 소설은 전에 사귀던 두 사람이 오래간만에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 주로 남자 주인공인 규호가 여자 주인공 정윤한테 하는 말이다. 술도 규호만 마신다. 정윤은 몇 모금 마시다 나중에는 커피를 시킨다. 이야기의 절정은 규호가 얼마 전까지 다니던 알콜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존(pigeon)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다. 피존이란 사람은 위에 적은 것처럼 맺히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양주 뚜껑이 돌아가면, 이제 이 술을 환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괴롭다는 사람. 규호와 피존 씨의 이야기를 읽으면 술을 좋아해서 마시는 것보다 술을 마셔야 사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혹은 인생에서 즐거움이 술 마시는 것 밖에 없는, 술 마시는 외에는 다른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보통 알콜중독에 걸린 사람들을 대할 때 어쩌다 알콜중독에 이르게 됐는지 물어보는 것보다, 그 사람의 의지력부족을 가지고 품평하는 경우가 많다. 물어보는 것은 상담사나 치료사의 전문 용어가 됐다. 솔직히 주변에, 술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으면 피곤함을 떠나서 짜증이 난다. 그리고 사건 사고가 술에 취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술이 없었으면 어떻게 지낼까 하는 경우도 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이 소설 주인공 규호가 말한 것처럼 술을 제대로 마셔야 나쁜 꿈을 안 꾸고 잠을 이루는 사람들. 끝없이 구멍으로 떨어지는 악몽이 두려워 마시는 술.
어디 꿈뿐일까. 현실에서도 떨어지기 않기 위해 술을 들이킨다. 술을 마시는 순간만이라도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면서, 잡고 싶은 게 없어지기 때문이다. 허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붕붕 떠서 날아가면 안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혼자 남은 규호가 맥주잔을 꽉 잡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술이 규호를 떨어지지 않게 해주었고, 맥주잔이 실타래가 되어 멀리 날아가는 규호를 다시금 감아주었다. 바로 이 장면을 읽고 소설의 제목이 떠올랐다. 규호는 무언가를 잡는 것보다 포옹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소설 초반에 규호가 정윤한테 이런 말은 한다.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며칠 전, 강연 전문 영상으로 유명한 TED사이트에서 중독에 관한 인상적인 강연을 봤다. 요한하리(Johann Hari)의 <당신이 중독에 관해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잘못되었습니다>강연이다 이 영상은 마지막 말만 들어도 비싼 위키스의 항기처럼 진한 여운을 남긴다
중독의 반대는 관계입니다.
「가짜팔로 하는 포옹」은 알콜중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앞서 규호에게는 잡을 것보다는 포옹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건 규호의 행위이고, 관계에 관점에서 보면 규호를 잡아주려 하지 말고 안아줘야 하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위에서 이 소설을 연속으로 두 번 읽고 마지막에 책을 접은 순간의 느낌이 오롯하게 남아있다고 썼다. 규호가 맥주잔을 꼭 쥔 것처럼, 나도 어떤 기분 또는 어떤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이 책을 펼쳐 두 손으로 책의 양 끝을 꼭 쥐어 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