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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렬 Jan 23. 2018

자물쇠 보다 단단한 팔짱

제 19회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리뷰(2016.10.16)


“공공시설 혈세낭비를 말할 때 유독 경기장만 호되게 비판을 받아요. 도서관이야 말로 세금 먹는 하마인데 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습니다.”

위 얘기는 2014년 5월 한국스포츠산업 경영학회가 주최한 세미나 ‘메가스포츠이벤트의 허와 실’ 토론시간에 패널로 나온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고위간부의 발언이다. 깜짝 놀랐다. 도서관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니. 더군다나 전혀 맥락을 고려치 않은 언사 아닌가. 인천아시안게임 경기장 사후활용 문제의 요지는 신축 경기장이었다. 정부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기존 시설을 사용하라는 권고를 무시하고, 1조 5,553억이라는 천문학적인 혈세를 들여 새로 지은 16개 경기장을 두고 한 말이다. 대회 폐막 후 일 년 간 16개 경기장의 적자는 164억. 인천아시안게임 관련 종합 채무비용은 1조 76억으로 나타났다. 도서관 채무가 이보다 더할까? 인천시 도서관 운영비 자료를 찾지 못하여 서울시 자료로 갈음하면, 2015년 서울시 도서관 146개소의 운영비는 1,153억이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러나 이용인원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7천105만 명. 서울시 인구 일곱 배가 넘는다. 가늠하기 어려운 숫자다. 그렇다면 경기장 이용인원은 얼마나 될까?

             

2014한국스포츠산업경영학회 세미나 ‘메가스포츠이벤트의 허와 실 현장


 인천시 경기장 이용현황 통계를 찾기 어려워, 2014년 전국 육상경기장·구기체육관·생활체육관 이용현황을 조사한 자료로 대신하면 33만5천명이다. 터무니없는 숫자다. 기왕 전국으로 살펴 본 김에 2014년 전국 도서관 이용인원을 봤더니, 자그마치 2억9천명이다. 프로야구 총 관중 수는 물론 영화 총 관객 인원도 도서관 이용인원보다 적다(표.1 참고) 그러니 공공체육시설과 도서관은 비교 자체가 불가한 수준이다. 말하자면 도서관은 생활의 일부이지만 이에 비해 공공체육시설은 극히 일부만 사용하는 공간인 셈이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수준이 이 정도였으니, 인천아시안게임이 당당하게 인천 채무의 3분의 1을 차지한 거 아닌가. 2016년 3월 기준 인천시의 채무비율은 37%로 전국 17개 시·도 중 가장 높다.
             


그렇다면 공공체육시설의 이용률을 높이면 혈세낭비, 적자운영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서울시를 기준으로 연간 이용인원이 천만 명이 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체육시설은 이용하려면 여러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장, 인원, 비용, 운동수준 등등으로 참여의 폭이 좁다. 그래서 대체로 이런 조건이 충족된 동호회가 체육시설을 독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도서관을 소환하자. 도서관은 이용이 너무도 쉽다. 우선 공짜다. 그리고 슬리퍼를 신던, 혼자오든, 한글을 배운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든, 심지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도서관은 언제든지 누구나 이용하는 곳이다. “민주주의 보루” “시민 교육의 현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시민참여활성화’와 공공체육시설 이용률 증대를 원한다면 이처럼 조건 구애 없이 누구나 넓은 잔디를 밟을 수 있게 하고, 혼자 관중석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만든다면 그만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지적질만 하다보면 나중에 자신도 지적당할까봐 당위 속에 몸을 가누기 십상이다. 그래서 직접 문제점을 해결해보자는 생각에 작년부터 ‘공공체육시설 자물쇠 철폐 운동’을 모략하는 중이다.
 
실천가능성 제고를 위해 거주지인 동두천시부터 시작을 할 요량이다. 가장 눈독을 들인 시설은 동두천시 게이트볼 연합구장이다. 동두천시 게이트볼 연합구장은 조형이 멋있기로 소문난 곳이다. 공교롭게도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모방한 황포돛대 형상의 지붕을 자랑한다. 오전과 낮 시간에는 활짝 열린 출입구 안 구장은 어르신들로 북적이지만, 직장인 퇴근 시간 즈음부터 출입구는 자물쇠로 채워져 굳게 잠긴다. 저녁시간 게이트볼장 외곽에 성벽처럼 둘러싸인 초록색 격자무늬 펜스 사이에 얼굴을 맞대고 문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보듯 텅 빈 구장을 들여다보면, 잘 눌린 누룽지 같은 진초록의 인조잔디가 보인다. 잔디를 보고 있으면 머릿속엔 케틀벨, 로프, 메디신볼, 바벨, 덤벨과 같은 피트니스 운동기구를 잔득 차려 놓는 상상이 군침 돌듯 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기획의 한계점을 발견했다. 대상자가 운동 가능한 사람에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점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덕분이다. 말하자면 올해 7월에서야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상암포럼>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각성을 하게 됐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3년 전부터 동두천 게이트볼장의 1,000배 큰, 동두천 시민 10명 중 7명이 수용 가능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예술로 물들이며, 공공시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이다.
             

동두천 지행동 게이트볼장


 기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더군다나 예술 공연 관람은 2004년 연극을 전공하던 친구의 졸업 작품, 2009년 한국무용을 전공한 동기의 무용 공연이 전부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예술축제는 도통 실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7월 하순 제 19회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참관해보니 현실이었다. 수사적으로 표현하자면 ‘낮선 시선으로 경기장과 현실을 이어주는 다릿돌’이 아닐까.
 
레드존 F구역 계단과 반경을 무대로 펼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같은 경우에는 공연 중반 공간을 망각하는 경험을 했다. 이 작품은 계단 아래 이등변 삼각형 형태이고, 주인공의 자취방으로 꾸며진 무대이다. 문제의 장면은 느닷없이 무대 위 계단을 내려오는 행인 역할의 연인들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여자가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간다. 뒤따라오던 남자는 객석 2시 방향부터 여자를 잡으려 하다가 5시 방향에 이르러서야 여인을 붙잡아 세우게 된다. 둘은 얼마간 옥신각신하다 결국 포옹을 한다. 내 몸은 본 무대를 뒤로 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초 정도 지났을까? 순간 계단 아래 무대에서 그들을 구경하던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마치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놓고 나온 걸 알아챈 사람마냥 “아뿔싸!” 하며 본무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후미진 계단 아래의 공간과 무심한 통로가 이렇게도 입체적이라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GATE.1에서 진행된 연희 거리극 ‘놀이꾼들 도담도담’의 <대동>은 공간과 사람을 이어주는 공연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객석을 가로질러 지나가던 어르신이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하다 결국 객석에 앉아 박수를 치며 관람하던 모습이다. 이렇게 관람을 하는 사람이 꽤 됐다.
 
관람의 대미는 블루존 C-D구역을 무대로 한 <영혼들의 향해 백 년 동안의 고독>이었다. 스케일이 큰 공연이었다. ‘세월호에서 죽은 어린 영혼들에 대한 추모곡’이라는 연출가의 말처럼 세월호가 주제인 작품이다. 공연 관람을 위해서는 탑승 수속을 마쳐야 한다. 계단을 올라가고, 계단 위아래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느낌이 신선했다. 그리고 극중 배에 문제가 발생하자 관객들을 벽 쪽으로 몰아, 통제하는 부분이 공간을 입체화시키고 상상을 구체화 시켰다.
 
허나, 고백컨대 가장 좋았던 시간은 경기장 관람석에 홀로 앉아 관망을 하던 순간이었다. 나는 윤대녕 소설가의 글 중에서 “텅 빈 축구 경기장 관람석에 앉아있노라면 원근법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이 듦과 동시에 어수선한 속내가 가라앉는 경험을 했다”는 구절을 인상 깊게 읽었다. 관중석에 앉아 초록 잔디의 경기장과 거대한 나비모양의 지붕을 필두로 아주 잘 쌓은 도미노 같은 관중석을 보노라면, 촘촘한 빗으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빗는 것처럼 시각이 빗질되는 느낌을 받는다. 시선에 깃이 세워진다고 할까?
             


이처럼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통해 경기장이라는 공간에서 여러 층위의 감정과 감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두천시 게이트볼장을 음악공연과 연극 무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게이트볼장은 충분히, 충분한 문화예술 공간이었다. 이 공간에서 밴드의 연주와 가수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 가던 길을 멈추고 눈과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아마 종전에 게이트볼을 치던 사람보다 곱절 넘는 사람들이 공간 속으로 입장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냉큼 게이트볼 자물쇠를 풀기 위한 작업을 실행해야겠다.
 
최근 정부를 필두로 학계에서 강조하는 공공체육시설의 가치는 “지역공동체를 위한 지역공동체 활동, 문화 활동 및 사회교육의 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사회적 가치와 도시 기능적 가치”이다. 좋은 말이나 막연하기 그지없다. 사회학자 김찬호 교수는 예술을 가리켜 “미처 보지 못했거나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던 그 무엇을 들춰내는 것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혹은 상암포럼은 공공체육시설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그 무엇’을 들춰냈음은 물론 체육계를 향하여 ‘그 무엇’ 좀 보러 오라고 간청하고 있다. 어쩌면 풀어야 할 건 공공체육시설 자물쇠가 아닌 체육계의 팔짱일지 모른다.

      


이 글은 [상암포럼Vol.2] 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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