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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백 자판기 Jul 15. 2021

[찻집과 일상] 내일을 위해 괜찮지 않은 오늘을 견뎠다

그날의 공간 : 경복궁 <생과방>

내 인생이지만 나도 모르겠다.


  고작 두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내 인생은 삼재도 이보다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온갖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연애와 이별. 건강 이상. 다사다난하게 진행하고 있는 생애 첫 독립 준비. 신규 프로젝트 도입에 따른 업무 확장 등등. 고작 한 달 반 만에 골치 아픈 모든 일들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업무는 업무대로. 연애는 연애대로. 가족 문제는 가족 문제대로 매일 같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탓에 머릿속이 지나치게 복잡했다. 지금까지 굵직하게 터진 사건들만 해도 3년은 지난 것 같다. 주변에서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인생사 잘 정리해서 라디오 사연으로 보내는 게 어떠냐고 농을 던졌다. 조만간 이사도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은품으로 김치 냉장고라도 하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자판기님 소식을 듣다 보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요?"

"인생사 변화 속도가 제 모델 업데이트 속도보다 빠르셔서요"

"...."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 해서, 어떻게든 열심히 잘 살고 싶었을 뿐인데 인생이 이렇게까지 다이내믹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 삼재도 아니던데.

  

모르겠다.


  나는 그저 내일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괜찮지 않은 오늘을 견뎠다. 지금의 내 상황과 여력이 어떻든 업무도. 꿈도. 연애도. 인간 관계도. 해야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모두 어떻게든 챙겨서 언젠가 안심하고 웃을 수 있을 날만을 기다렸다. 요령을 피우는 것보단 참는 것을 훨씬 더 잘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한 일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엉망이 되었다.


  연애는 실패로 끝났고, 독립은 준비하면 준비할수록 가족들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며, 업무는 업무대로 추구하고자 하는 퀄리티가 나오지 않아 매일같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데다  치료 역시 제대로 되고는 있는 건지 알 수도 없는 나날들이 매일같이 지나갔다.


언제 와?


  일상을 정상적으로 영위하는 척하는 것 자체가 힘에 겨울 무렵 마치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몇 달 전부터 잡아두었던 호캉스 일정이 다가왔다. 본래 이 호캉스를 잡은 의도는 일상에서 잠깐 일탈하고 힐링하고 오자는 거였던 것 같은데. 어쩐지 따끈따근하게 갓 구워진 우울을 받아들이기 위한 여행이 되어버렸다. 과거의 나는 대체 무엇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친구들과 여행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해야 할지. 아니면 나는 호캉스마저 이렇게 나의 괴로움 때문에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것에 괴로워해야 하는지 영 혼란스러웠다.


내일 <생과방> 가기로 했지?


  카톡이 울리는 소리에 출발하기 2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짐도 못싸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짐을 쌌다. 정상적인 나라면. 아무 문제도 없는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며 "문제없는 일상"을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애를 썼다. 감정에 취해 아무것도 못하면 못할수록 후회만 남는다는 것을 과거로부터 너무도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들을 기억하고 그대로 수행하기. 지나갈 이 순간,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순간들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며 호캉스를 떠났다.


경복궁 경회루의 풍경. 날이 참 좋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친구들과 향한 곳은 경복궁 <생과방>이었다. 경복궁에서 6월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다실은 오직 당일 선착순으로만 갈 수 있었다. 지나치게 날이 좋은, 그렇기 때문에 지나치게 날이 더웠던 토요일 아침 우리는 경복궁 입장권을 끊기 위해 아침 8시부터 숙소를 나서 경복궁까지 걸어갔다. 입장은 9시부터 할 수 있다곤 하지만, 8시 반부터 줄이 길어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했을 때 경복궁 입장 줄은 벌써부터 <생과방> 때문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궁에서 차를 마시고 싶어 한다니... 차를 마시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장하자마자 우다다 뛰어가다니... 친구들과 예상치도 못한 마라톤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복궁에서 한시적으로 운영했던 <생과방>. 현재는 다음 시즌까지 준비 기간을 가지는 중이다


  이미 낭만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새파란 하늘 아래 있는 고즈넉한 한옥. 그 밑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가는 사람 무더기. 땡볕 아래 있는 대로 길게 늘어진 줄. 한옥 아래 평안한 분위기에서 맛있는 차와 다과를 마시고자 했던 기대는 역시 접는 게 좋겠다 싶었다.


남은 다과가 있을까?


  거의 맨 앞줄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리가 입장하게 된 시간은 무려 5시간 뒤였다. 래도 아직 운영시간이 3시간 넘게 남았으니 다과가 넉넉히 남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막상 가보니 전부 품절되고 딱 한 종류만 남아있었다. 어떤 다과가 맛있을지 친구들과 실컷 이야기하며 왔는데... 씁쓸한 마음으로 남아있는 메뉴들을 주섬주섬시키곤 멍하니 바깥 풍경을 보았다.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가 있는 건 아니지.
2021 생과방 시그니처 메뉴 <건공다>


  맥이 탁 풀렸다. 럴걸 알면서도 기대했던 스스로가 싫었다. 간절히 바라면 바랄수록 망만 커진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무언갈 기대하려 하는지. 어떤 일이건 결과는 기대하지 말고 최선만 다하자고 마음먹어 놓고, 이번에도 또 무언가를 기대했다는 게 싫었다. 상처만 남을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또 기대했을까. 한없이 울적해질 무렵 친구가 나를 불렀다.


이거 봐. 차에 단청이 담겼어!
친구가 찍은 사진. 찻잔에 담긴 기와 단청


  그러게. 여기에 있네, 우리가 기대했던 낭만이. 오늘 하루 흘러가는 모습을 보니 낭만과는 거리가 멀겠다고 했건만. 친구의 잔에 우리가 말했던 낭만이 담겨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고, 엉망이었어도 오지 않은 것보다는 좋았다. 힘들고, 지치고, 울적했어도 해보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든 경험해보아서 좋았고, 아직 모른다는 미련 속에서 헛된 환상이 커지는 것보다는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마주한 순간, 그동안의 힘든 순간들을 견뎌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해질 내일을 위해 괜찮지 않은 오늘을 견뎠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 어쩌면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그렇게 견뎌내듯 살아갈 것 같다. 단편적인 좋은 일들로 치유되기엔 너무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고, 그로인해 "괜찮아"라고 말하기엔 괜찮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될 일들 때문에 현재를 놓을 수도 없으니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살아가긴 해야 했다.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으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질 상태가 되거나, 지금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싶을 만큼 또 다른 사건사고가 터져서 평소의 나를 되찾거나 평소의 나인 척하는 나를 유지하거나. 둘 중 하나는 계속해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제를 살아왔고, 오늘을 살고 있고, 내일을 살아간다.



그날의 공간

생과방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실제 임금이 먹었던 궁중 병과와 궁중 약차를 체험할 수 있는 곳

경복궁 입장권을 끊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평일에는 사람이 적은 편이었으나, 주말에는 오픈 전 1시간 전부터 줄을 서도 다과를 먹어보기 힘들었다. 전반적으로 준비된 다과의 수량이 매우 적은 편.

6월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했으며, 향후 준비 기간을 마친 후 새로운 시즌으로 오픈할 예정이다.


주문한 메뉴

차 : 건공다 

생과방의 시그니처 차 <건공다>. 모든 차 중 유일하게 티백 포장이 되어있다.

인삼, 백출, 건강, 감초가 들어간 차이며, 영조가 가장 사랑했던 차였다고 한다.

인삼이 들어갔지만 의외로 고소한 곡식의 맛이 강해서 인삼의 향을 느끼긴 어려웠다.


다식 : 단호박 찰편

본래 남아있는 모든 다식을 시키는 것이 목표였으나, 도착했을 땐 단호박 찰편 하나만 남아있어 선택지가 없었다.

본래 판매되는 다식으로는 주악, 약과, 정과, 매작과가 추가로 준비되어 있었으며, 한정 다식으로는 마로 만든 향기로운 떡인 <서여향병>이 있었다.

본래는 이쁜 그릇에 담아주지만, 코로나로 인해 개별 포장된 상자 안에 다식이 있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다식이었던 <단호박찰편>



이런저런 주관적인 생각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생과방>. 여러모로 아쉬운 공간이긴 했지만, 한 번쯤은 꼭 체험해볼 만한 공간이긴 했다. 차와 다식의 퀄리티가 가격 대비로 좋은 편. 특이 필자가 방문했던 날은 날씨가 매우 좋아서 경복궁 곳곳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줄을 많이 서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재방문 의사가 있는 곳.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고, 체력이 좀 붙으면 다시금 <생과방> 오픈런에 동참하여 경복궁 마당을 뛰어다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p.s 본의 아니게 마라톤을 하긴 했지만, 본래 궁 내에서는 뛰는 게 금지되어 빠른 걸음으로만 다녔어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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