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에 피아노 교습소가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그 교습소 유리문을 열고 싶었는데
초등학교 6년 동안 머뭇거리기만 했을 뿐 한 번도 그 문을 열지 못했다。
---도올 김용옥의 <난세일기> 중에서
3일 후엔 아들을 만난다。3년? 4년 여 만이다。아들이 다섯 살 때였다。
“아빠는 왜 같이 안 가?”
헤어지는 아들을 안아 주지도 못하고 돌아서는 못난 아빠가 되어 달려야 했다。이런 나의 뒷모습을 다섯 살 아이는 황당하게 보고 있었을 것이다。아빠가 왜 그러지? 자기하고 놀아준 유일한 사람인데。。。 원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그 이유를 알 리 없을 테니。야속했을진 모른다。자기를 떼어놓고 도망치는 것으로만 봤을 테니。야비하다고 봤을진 모른다。그런 단어를 몰랐을 테니 다행이다。
“왜 같이 안 가?”라고 묻기 전에 또 하나 물은 게 있다。
“이젠 누가 나랑 놀아줘?”
아들을 안으며 '미안하다'라고 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을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아들을 보듬으며 '엄마랑 잘 지내라。'라고 아이에게 거짓이 될 부탁을 할 수도 없었다。'그래도 엄만데 설마。。。'
안고 보듬다보면 흐느끼고 말 아빠의 대답은 어린 아들의 품에서 할 일이 못 됐다。도망치듯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날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아들에게 매일 편지를 쓰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보내지 못하는 편지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너와 나、자식과 아빠로서 이 세상에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5개월쯤 지나 아들과의 만날 준비편지는 더 이어가지 못했다。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빠가 없는 그 5개월 동안、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그 시간 동안。。。
극단적인 생각을 매우 구체적으로 하기에 이르렀다。하지만 나를 위해서도、아들을 위해서도 결코 옳지 않았다。점점 더 쌓여가는 그토록 보고 싶은 마음은 한편 원한으로도 깊어졌기에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됐다。
용기가 담긴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 풀 발레리
분노를 누르니 용기가 된다。한 달에 한 번、만날 수 있었지만 또 헤어져야 하는 아픔은 아들도 나도 가슴을 더 찢어지게 할 뿐이어서 “우리만 보고 오는 게 낫겠다。” 누나와 어머니만 아들을 만났다。누나의 편에 매달 100만 원을 그 쪽에 보냈다。꼭 피아노를 가르치게 하라고 해서다。수강료다。그리고 모아 중고 피아노라도 사주라고 해서다。장난감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며 혼자서도 잘 놀던 아들이었다。피아노가 아빠를 대신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하지만 만나고 온 누나는、
“이러지 않아도 돼。피아노학원에 한 번도 데려간 적이 없단다。”
그래도 열 달 배에 품고 낳은 아들인데。。。 희망을 끊지 않았다。
“곧 보낼 것 같더라。재혼할 것 같이 말하던데。”
4개월 지나 아들을 데려왔지만、
“우리 가슴도 이렇게 찢어지는데 네가 보면。。。”
엄마가 맡아줬다。해서 또 거의 1년을 기다려야 했다。
“피아노 치는 걸 무척 좋아하더라。하루에 10시간 넘게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더라고。”
다행히 아들은 피아노를 좋아했다。
<쇼팽과 상드>로 찾아갔다。
“피아노를 가르쳐 주세요。”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유나에게 고백했다。
“아들이 온대요。”
“그래요? 정말 잘 됐네요。근데 피아노는 왜?”
장난감 피아노로 아들과 놀아 본 유일한 노래가 있다。<젓가락행진곡>이다。장난감이라도 소리는 났고 건반이 작아 손가락으로 흉내내고 입으로 소리내며 아들과 치며 놀았던 젓가락행진곡은 둘이서 치는 연탄곡이다。오른쪽 높은 음은 양손 집게손가락으로만 두드리면 되고、왼쪽 낮은음은 쿵짝쿵짝짝、뽕짝 같은 반주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왼쪽 오른쪽、아들과 아빠가 나눠 치곤 했었다。
“근데 다 잊어버렸어요。”
유나에게 젓가락행진곡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시범을 보여주고나서 다른 곡들도 연주해서 보여준다。매우 신나는 곡들이다。곡 하나가 끝나면、 “이건 코시코스의 우편마차이고예” 또 하나를 끝내면 “이건예、 가베트의 철도라고 합니데이。”
“참、 브람스 좋아하시지요?”
하며 헝가리 무곡을 연탄곡으로도、
“그 어려운 차이코프스키도 이렇게 칠 수 있다 안 합니껴。”
신나는 표정을 지으며 <꽃의 왈츠>를、 울적할 <비창>마저도 신명나다。
“이 곡들을 다 아들과 같이 칠 수 있어예。모두 연탄곡으로 편곡이 돼 있거든예”
말끝마다 '예、예' 경상도사투리로 말하는 유나에게 서울사람이 그래도 따라하기 쉬울 것 같은 전라도사투리로 장난스럽게 대답한다。
“그걸 다 내가 칠 수 있다는 거여?”
유나도 어줍지만 흉내내어、
“그렇탕께。내가 거짓말혀는 거 언제 한 번이락도 봤지라? 나、제대로 한 거 맞아예?”
까불던 유나가 정색을 하며 내 손을 잡는다。
“아들 맞을 준비、참 예쁘네예。”
맞을 준비를 못 한 적이 있다。결혼이 그랬으니 아들도 그랬다。
선후배 그리고 우정에서 이성 관계로 끝내 이어가질 못했다。1박 할 예정으로 지리산으로 종희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둘 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숙박객 아무라도 치라고 콘도 로비에 놓아둔 피아노 앞에 종희가 앉았다。연주하기 시작했다。은파의 한 소절、여동생이 하도 많이 연습했던 곡이라 익숙했다。
'결혼하면 아내가 치는 피아노를 들으며。。。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와 엄마가 쳐주는 피아노를 들으며。。。'
종희의 음파를 들으며 이런 생각까지 했지만。。。 '결혼 전엔 절대 안 돼! ' 내 소중한 사람을 그 고귀한 첫날밤 의식으로 맞이하고자 했던 마음이 흐트러질 뻔 했었다。아버지가 골라 준 여자와 결혼하게 될 무렵、
'그때 나와 종희가。。。'
사랑이 있었다면 어쩜 아버지에게 단호했을지도 모른다。책임감이 강했던 나는 강제된 책임감에 내 자신을 맡기는 소심한 인간이기도 했다。언제나 하지 못한 지난 과거에 묶여 살아온 나에게 무책임 역시 무색할 수밖에 없었다。
'종희와 결혼했다면?'
이런 가정 역시 참으로 무책임하다。또 과거에 젖어 고개를 젓는 나를 보고 유나가、
“왜요? 어려워 보여예? 쉬워예。그런데 아들은 피아노를 치나요?”
들어 보지 못했다。동생이 전화로 전해 준 말로는、 “재능이 꽤 있던데。악보 보는 걸 다들 어려워하는데 전혀。악보를 얼마나 잘 보는지。。。”
“체르니 30번을 치고 있다네요。”
“그래예? 그럼 이런 거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예。뭐 눈 감고도 치겠네。문제는 여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유나의 오른쪽에 앉아 집게손가락을 곧추세워 건반을 두드려본다。다시 쳐보는 젓가락행진곡。피아노 건반 위에서 움직이는 나의 집게손가락이 마치 바닷게가 걷고 있듯이 기우뚱갸웃하다。말 없이 끼어든 유나의 낮은음 반주로 우린 세 번을 연거푸 쳤다。
전학 절차를 다 밟아 구림초등학교 2학년으로 첫 등교하는 날、나는 자전거 뒤에 아들을 앉히고 학교로 향했다。내 등으로 아들의 가슴을 느낀다。따뜻하다。나도 아들도 말이 없다。저 앞에 양순 씨가 보인다。일부러 나와 있는 듯하다。김봉길, 강영림 부부도 보인다。유나도、 사랑의 기쁨 슈퍼의 노부부와 함께 구림사거리에 서 있다。다가가기도 전에 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응원 인파 속에 아버지가 보인다 。어젯밤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구림면에 가실거란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잖아?" 자전거 핸들을 아버지에게로 향한다。"할아버지!" 아들이 큰 소리로 부를 때 나는 속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자전거로 달리는 우리 부자를 향해 두팔 들어 흔들어준다。 아들이 내 등을 더 꽉 당긴다。아들의 모은 두 손이 내 가슴을 더 꽉 붙든다。
'아빠、이젠 나랑 절대 헤어지면 안 돼!'
꼭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들려온다。학교가 가까워지자 반가운 노래가 들린다。등굣길 안전도우미로 한 손에 깃발 들고 두 팔 벌려 학생들을 보호하고 있는 양순 씨의 남편 고달범의 가슴엔 작은 카세트가 걸려있다。그 곳에서 나오는 노래、김광민의 <학교 가는 길>이다。우리를 보고 왼손을 흔들더니 오른손으론 목에 건 카세트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며 뻐긴다。
'알고 있어요。 듣고 있어요。'
뒤에서 아들이 속삭인다。
“아빠、나、 저 노래 피아노로 칠 수 있어。아빠한테 들려주려고。。。 ”
더 꼭 껴안는 게 또 등에서 느껴진다。
“학교에 아빠랑 이렇게 가고 싶었거든。”
아들의 가슴에 안긴 아빠의 등이 뜨겁다。아빠는 등으로 아들의 가슴을 품는다。학교 정문에 도착했다。교정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학교 앞 주크박스로 달려가서 버튼을 누른다。엘가의 <사랑의 인사> 볼륨을 높인다。아들이 돌아보며 오른팔을 들어 흔든다。교실에서 어쩌면 <위풍당당행진곡>도 들을지 모른다。
'그러렴。그렇게 살으렴。'
내 맘에서 하는 말이지만 아들 귀에 들릴지 모른다。
우연은 꼭 사연을 품고 그 사연으로 우연은 늘 특별하다。그러고 보면 사는 게 다 특별하다。그래서 오늘도 '특별한 날'이다。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삼부자가 함께 만난 일은 거의 없었다 。오늘은 달랐다 。
"다시 엄마랑 같이 곧 내려오마。"
아버지는 바로 서울로 올라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