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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이의 스케치북

by 차쌤 May 09. 2024

12。종민이의 스케치북---윤이상 &



      가족은 자연의 걸작 중 하나이다

         ---조지 산타야나(미 철학자、시인)



“형인데、 나보다 10살도 많지 않은 형인데。。。”

서울의 국립현충원에 다녀온 그 날、종민이는 내내 제 방에 틀어박혀 두 끼나 걸렀다。

“가지 말았어야 했어!”

종민의 엄마가 걱정하며 아빠에게 후회의 말을 꺼냈다。

“현충원을 참배하는 정치인들을 보고 무척 가보고 싶어 했잖아。”

종민의 아빠 역시 끄덕이며 후회하는 눈치였다。종민이는 TV에선 보여주지 않는 묘들에 더 관심을 가졌다。전직 대통령의 거대한 묘가 아니었다。마치 전철 안 인파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무덤들에서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갈까?”

엄마가 손을 살며시 끌었다。

“스무 살 좀 넘었어。”

그리고 하는 말、

“한국전쟁 때도 아닌데 왜 여기에 묻혀 있지?”

'군 복무 중에 사고가 났던 거란다。’ 차마 아빠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단지、

“종민아、 배 안 고파 ?”

종민이가 다시 되뇌었다。

“나하고 열 살도 차이가 나지않는 젊은 형들인데。。。”


20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로 종민이도 오래 못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신의 20살과 별 차이 안 나는 현충원에 묻힌 형들을 나이로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친구들과 한참 웃고 떠들며 놀고 있어야 할 15살 소년은 태어나서 집보다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태어나자마자 죽음과 싸워야 하는 종민이가 엄마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엄마、나 병 다 나으면 여행을 많이 할 거야。”

종민이는 책으로 그 여행을 대신했다。책에서 여행사진을 보고 따라 끄적거리는 낙서로 발로 하는 여행을 대신했다。

“엄마는 어디가 가장 좋았어?”

물었을 때 대답을 못 하고 엄마는 결국 눈물을 쏟고말았다。아빠가 대답했다。

“우리 셋이서 여행을 떠나자、 당장”

좋아하던 종민이 잠깐、이내 표정이 굳어지더니 “아빠는 바쁘잖아。”


사실、의사로서 병원에 묶여 아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다。의사라서 더 나은 치료법으로 의사들과 상의를 하고 이에 따라 종민이를 더 병원에 가둬야만 했던 일 밖에 한 일이 없다。하지만 치료를 하면 할수록 나아지고 있다는 말보다 점점 심해진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의사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1년 휴가를 얻어냈다。


“여행 갈 때 무엇을 갖고 가고 싶니?”

여행 채비를 하며 엄마가 물었다。

“카메라。근데 이 스마트폰이면 충분해。”

통화하고 문자 메시지 나눔 등 남들과의 소통도구로는 쓰지 못하는 핸드폰으로 유일하게 즐기는 건 사진 촬영이다。그것도 밖에 나가서 찍는 게 아니라 종민이의 피사체는 항상 병실이거나 책이다。여행책의 사진을 사진으로 찍는 일、얼마나 갑갑하고 답답했을까。


서울의 국립현충원에서 전직 대통령 등의 호화무덤은 한 장도 찍지 않았다。종민이와 나이 별 차이 안 나는、그런 젊은이들의 초라한 묘를 찍었다。그 묘들에게선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사망한 날짜 외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목숨을 잃은 이유가 있을 텐데。아빠、이 형들은 다 나라를 위해서 몸 바친 거 아냐? 그럼 더 그 이유를 묘비에 짧게라도 새겨줘야 되는 거 같은데。목숨은 다 똑같이 소중하고 귀한 거라고 했잖아。”

종민이는 이 말을 하며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나는 뭐 하나 나라를 위해 한 일도 없이。。。 군대도 못 가잖아。난 정말 가고 싶은데。”

식음을 끊고 종일 방에서만 있었고 현충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떠나자!” 란 말에 여행을 다시 시작하며 방에서 나올 수 있게 했다。광주에서 망월동 5.18 민주묘지는 이런 이유로 피하고자 했다。그러나 종민이는 또 책을 보았고 TV에도 나오는 그 곳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나 보다。종민이가 먼저 가자고 한 곳、국립 5.18 민주묘지였다。

“서울도 아닌데 왜 여기에 이런 게。。。”


막는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고、감춘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라는 걸 16살 소년의 눈에서 알 수 있었다。학교를 가지 않고 병원에서만 있다 보니 책이나 검색 등으로 자기의 관심사나 호기심을 채워야 했던 종민이는 이미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정치군인들이 오로지 자기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죄 없는 시민들을 무참하게 죽인 곳이라 종민이 부부는 더 피하고 싶었다。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종민이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고 앞장서 걷는 종민이의 뒤를 따르던 엄마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서울 현충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상처 입을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고 무너져내렸다。광주에는 큰 기념비와 하늘을 찌를 듯한 두 팔 치켜든 동상은 있었지만 서울 현충원처럼 전직 대통령이나 장군들의 초화묘는 찾아볼 수 없었다。다 고만고만 비슷비슷했다。현충원과 다른 게 눈에 띄었다。돌에 새겨진 사진과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안내판이 작지만 묘 옆에 붙어 있는 것도 보였다。그 때였다。


“나보다 더 어린데 왜 여기에?”

초등학생의 묘였다。종민이가 떠나려 하지 않았다。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노트를 꺼내 자기보다 어린、 앳된 초등학생 소년을 연필로 그리고 있었다。부모는 심히 걱정됐다。이러다가 또 여러 끼니를 거르고 더 건강이 악화될 텐데。한참만에 일어선 종민이가 걸어간 곳은 구묘역이라는 민족민주열사 묘지였다。가던 걸음을 멈췄다。

“여긴 버려진 공동묘지 같아。”

풀이 무성하고 쓸려내려가 마치 피를 흘리고 있는 듯 붉은 흙이 드러난 무덤을 보고 하는 말이다。부모의 눈에는 묘비에 새겨진 익숙한 이름들이 띄었다。이한열、강경대。。。。。。 종민이의 엄마 아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국립으로 나라가 지켜준다는 곳을 왜 이렇게 폐허로 방치해 놨지?'


이러고 한탄하고 있을 때 종민이는 긴 풀을 뜯고 있었다。관리사무소로 갔고 벌초비를 기부할 테니 。。。 절차가 복잡하다며 관리직원은 매우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벌초전문가에 부탁해서。。。”

이래도 안 된다며 쫓겨나고 말았다。할 수 있는 거라곤 현수막을 다는 것。

'벌초를 해 드립시다。우리가 할 테니 허락해 주십시오。'


현수막 제조업자가 불법이라 곧 뜯겨질 것이고 연락처를 현수막에 남기면 벌금을 때릴지도 모른다고 말렸다。그래도 걸었다。그래도 현수막을 걸어야 했다。부모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었다。설마。。。 다행이랄까。5.18 민주...의 한 단체에서 연락이 왔다。며칠 후 그 단체에서 보내온 말끔이 정돈된 사진을 종민에게 보여줬다。


“풀은 또 자랄 텐데。。。”

한 번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걸 어린 종민은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절대 잊지 않고 매년 추석 전에 꼭 벌초해 드릴 거야。이번에 한 것처럼。그럼 됐지?”

종민이가 환하게 웃는 걸 오랜만에 보며 또 부부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아빠、그런데 왜 광주엔 대통령 무덤은 없어? 국립이잖아。”

“그러게 말이다。”

엄마의 대답이고、

“적어도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만은 광주에 모셔져야 되는 것 아닌가? 뜻 한 번 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그 많은 분들과 함께 이 분들은 함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그 두 분은 대통령이라도 했지만。。。。。。”

아빠가 아들 종민에게 들리게끔 또박하게 말했다。

“민주대통령답게!”

엄마가 말을 이었다。

“대통령이 모셔진 곳이라면 이렇게 버려지진 않을 거 아니야。”


아들은 2년 후 세상을 떠났고 부부는 아들에게 '매년 벌초는' 아들과의 약속지키기로 아름다운 유산을 남겼다고 자족하며 아들과의 헤어짐을 달랬다。종민이의 짐을 정리하다가 스케치북을 발견했다。잊었던 일이 떠올랐다。순창 구림을 여행할 때、

“왜 여긴 한국인 음악가는 없어요?”

라고 의아해 하던 종민이는 그때 한 할머니에게서 받은 스케치북에 여러 명의 얼굴을 그렸다。누군지 알 수 없지만 다 한국인이란 건 알 수 있었다。낙서 같은 서툰 그림 아래에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윤이상、끌로드 최、김광민。

윤이상 옆엔 메모도 보였다。경남 통영 출생、독일에 살며 한국엔 돌아오지 못한 세계적인 작곡가。1981년도에 <광주여、영원히>를 작곡하여 독일에서 초연했다。왜 독일에서지? 한국인이 왜 한국에서 못 하고? 

그리고 '그 광주'라고도 적혀있다。아마도 스마트폰으로 찾아봤을 것、어른들은 잊었는데 소년 종민은 그 때 일을 잊지 않았다。종민이의 스케치북에는 어린 꼬마의 얼굴도 보였다。그 아래。。。


'나보다 어린、지금 살아 있으면 아빠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많을。'


광주 5.18 민주 묘지에서 본 그 소년이었다。

“그래서 다시 오셨군요。”

양순 씨와 구림 주민들이 종민 부부를 반긴다。

“우리 종민이 말을 잊지 않고。。。 감사합니다。”

구림슈퍼였던、지금은 <우리 슈퍼、 사랑의 기쁨>으로 바뀐 구림사거리의 슈퍼를 가리킨다。종민 부부는 도로 끝의 빈 방앗간에 대해 물었다。

“다 쓸모없는 것이 돼 버렸지예。부산 근처에도 저런 방앗간이나 정미소가 많아예。”

부산에서 전북땅 구림으로 온 영임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다。

“그래서 말인데요。”

종민이는 구림에 다시 오고 싶어했으나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 동네 어른들은 나하고 한 약속을 꼭 지켜 주실 것 같아。”

'다음에 오면 한국인 음악가도 여기서 볼 수 있을거다。'라고 한 약속이었다。

역시 순발력과 추진력을 양순 씨가 발휘했다。대전에 살고 있는 방앗간의 주인과 연락했고 면사무소 공무원과도 상의했다。

“저희가 매입하면 안 될까요?”

“쓸데없는 것을 왜요?”

그 동안 모아둔 기부금이 꽤 된다。월급의 십분의 이、십이조로 모은 돈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부모로서 좀。。。 도저히 종민이를 보낼 수가 없어요。”


방앗간에 외양은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안을 수리하고 정리정돈했다。종민이의 손길과 눈길이 닿은 많은 책들을 모아두니 작은 도서관이 됐고、역시 종민이가 갖고 놀던 수많은 장난감들도 모아 정리하니 어린이놀이방이 됐다。


“밖에 벽화는요?”

모두 나를 쳐다본다。

“종민이가 그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그대로 복사해서 그려넣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망월동의 소년、윤이상 그리고。。。”

내가 대답한다。“그거 참 좋습니다。” 모두가 박수를 친다。쓸모없어진 방앗간은 다시 살아나서 또 다른 제몫을 하게 됐다。<종민이의 스케치북>으로。종민이가 그린 한국인들과 함께。

방앗간에 종민이의 그림을 다 그리자 유나가 하늘을 가리킨다。


“종민이가 보고 있을 거예요。저 스케치북을 가슴에 꼭 안고요。”

평소답지 않게 쑥스러워 얼굴이 빨개진 양순 씨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살며시 소곤소곤 거린다。

“내가 주인공이 된 거 맨크럼 쫌 거시기 하구먼。”

“맞아요。 이장님이 주인공、 주연 맞아요。종민이에게 그 작은 스케치북이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거든요。”

눈물로 얼룩져 있는 종민이 엄마의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아빠가 그런 엄마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으며、

“당신이 그 동안 참 애썼어!”


우연 같은 일로도 우린 가슴이 풋풋하고 훈훈해질 수 있다。우연 같은 일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 우연은 어쩌면 기적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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