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화목)를 귀하게 여기고 거스르지 않음을 종(우두머리)으로 삼으라。'
---604년 쇼토쿠 태자가 편찬한、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헌법 <헌법 17조>의 제1조
일본의 두 여자를 얘기하고자 한다。남편에 대한、그리고 부부의 얘기다。50대、60대 중장년의 부부는 3~40년 함께 살아온 일본의 부부다。N부부는 둘 다 순 일본인들이고、M부부는 재일교포 일본인들이다。은퇴한 남편이나 아내의 삶은 한국과 별 다를 게 없다。'부부 각자'라는 데에서 그렇다。그러면서 한 집에서 부부로 사는 것도 같다。그러나 두 남편이 지향하고 있는 삶은 목적이 분명하고 독특하다。N의 남편은 일본 전국의 산들을 다 등산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고、M의 남편은 각 기종의 여객기를 모두 다 타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거의 혼자서다。이들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아내나 자식이 참견하지 못한다。퇴직 후 퇴직금을 가족에게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자신 혼자를 위해 쓴다。그러니 남편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아내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번 돈으로 N은 한국의 <동방신기>공연 때마다 따라다니는 데 쓴다。한국엔 40회 정도、일본 국내 공연은 물론 홍콩이나 대만 공연도 빠뜨리지 않는다。M은 아들과 식당을 꾸리고 있는데 손이 필요한 바쁜 때조차 남편은 한 번도 도와준 적이 없다고 한다。나를 놀라게 한 건 아내들의 반응이다。아내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사토리 세대란 말은 요즘 일본 젊은이들을 두고 하는 신조어다。사토리란 깨달음、달관、득도、해탈이란 뜻을 갖고 있다。달관、해탈이라지만 사실은 포기이다。불만 없는 포기이며 불평 않는 체념이다。미래에 대한 희망은 물론 욕심도 없는 세대、'지금 이대로가 좋아。더 노력해서 더 잘 사는 것은 관심 없어。'
이는 일본에서 흔한 말인 '미노타케시루' 의 또 다른 변형이라 볼 수 있다。17세기 에도시대 이시다 바이간이 주장한、근검절약하는 일본인의 국민성으로 만든 '놀면 뭐 해'의 또 다른 시대적 변화 또는 적응이라 말할 수 있다。'몸의 길이를 안다、'라는 '미노타케시루'는 한국의 '누울 자리를 봐가며 발을 뻗는다。' 와 유사하다。'형편에 맞게'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사토리 세대의 포기에는 소비도 포함된다。낭비하지 않고 있는 것 갖고만으로。。。 일본의 사토리 세대는 한국의 MZ세대나 욜로족의 선택적 포기와는 다르다。사토리 세대 이전엔 니트족 히키코모리가 있었다。방에 갇혀 은둔생활을 즐기는 지금 40~50대를 일컫는다。
퇴직금도 내놓지 않고 그 돈으로 혼자 자신의 취미를 즐기는 남편에 대해 불만이 없어 보이는 두 일본 아주머니를 보며 사토리보다는 604년에 쇼토쿠 태자가 관리들을 위한 도덕적 자각과 자세의 행동모범으로 삼게 한 <헌법 17조>를 더 생각나게 했다。
'화합을 귀하게 여기고 이에 거스르지 않게 행동하라。'
관리들을 위한 지침서는 일본 왕족이나 사무라이들보다는 일본 국민들을 다스리는 법으로 변질됐음을 일본 역사로 확인한다。왕족들 간의、또는 사무라이와 천왕과의、또 사무라이들끼리의 잦은 싸움에 화합은 없다。한국 등 동아시아에 저지른 침략을 보면 일본의 화합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가정의 화합과 세상에 거스르지 않게 행동하려니。。。 불만을 드러낼 수가 없던 것 아닌가。그 속은 알 수 없지만 두 일본 여자의 웃음은 겉으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일본도 정치인들끼리 자주 싸운다。그러나 외국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 정치인들은 어느 당의 관계없이 하나의 뜻으로 뭉친다。그 예가 독도 문제다。최근엔 후쿠시마 핵 오염수 투기방류도 그렇다。
그러나 일본과는 달리 국내 정치인들끼리의 대립은 외국과의 문제에서도 극단적 차이를 보이는 한국을 보면 도대체 한국의 보수가 무엇이고、한국의 우익은 도대체 무엇인가。이에 편승하는 한국 언론은 또 어느 나라의 언론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후쿠시마에서 온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반대단체의 대표 쿠로다 세이코가 후쿠시마 핵 오염수 투기방류를 찬성하는 한국의 정권에 대해 한국 땅에 와서 성토하고 있었다。역시 이 세이코님의 주장은 한국의 모든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고 있다。일부 유튜브 방송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두 일본 여성으로 돌아가자。내가 물었다。
“남편과는 대화를 하고 사느냐?”
“안 한다。”
대화가 서로를 불편하게 한다며 덧붙인다。
“남편이 좋아하는 것하고 살 듯이 나도 그렇게 산다。그럼 되지 않았느냐。”
한국과 매우 비슷하다。
“왜 싸워?”
다투는 것조차 피곤하다。
“싸운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언뜻 해탈 같고 득도 같다。사토리 하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가 된 일본인들을 보며、'그냥 괜찮아'가 유행어가 된 한국인이 오버랩된다。'사토리'나 '그냥 괜찮아'를 결코 긍정으로 볼 수는 없다。가족이 포함된 남이야 어떻든 나 혼자 즐기면 돼、이것이 긍정인가?
현실 극복과 미래지향보다는 현실안주와 미래상실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현실안주나 미래상실은 정체에 가깝다。이 정체에서 '고인물이 썩는다'는 속담이 떠오른다。물이 썩듯이 사람이 썩으면? '미노타케시루' 즉、'형편에 맞게'는 타협이나 협치로도 들린다。변화화려하지 않는 것、정체、고인물이 아니고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