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의 난바를 구경할 생각으로 길을 나선 교토 개구리와 교토를 구경하려고 길을 떠난 오사카 개구리가 천왕산 근처의 길가에서 우연히 만났다。먼 길을 가지 않아도 우선 이 산의 정상에 오르면 교토도 오사카도 한눈에 보인다고 해서 그 꼭대기에 올라 발꿈치를 들고 멀리 내다 보았다。교토 개구리가 먼저 말했다。
“오사카의 명소들을 보니 그다지 교토와 다르지 않군。”
이에 오사카 개구리가 말했다。
“예부터 화려한 수도라고 이름만 높았지 교토도 오사카와 다를게 없군。”
개구리는 뒤쪽에 눈이 붙어 있으므로 두 개구리가 뒷다리를 세워 바라본 곳은 각각 자기가 떠나온 자기 고향이었던 것이다。
---에도 말기 심학자 시바타 규오의 <규오도화> 중에서
<절대지식 일본고전(마쓰무라 아키라 외//윤철규 옮김//이다미디어에서 냄)>에는 이에 대해 다음 설명을 달았다。
사람의 눈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그것이 잘못되면 모든 판단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오사카 여행을 무척 많이 한다。도톤보리라는 번화가가 있는 곳이 난바인데 이 곳은 한국、특히 백제와 매우 밀접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일본에 처음으로 한자와 천자문을 소개한 왕인의 묘가 있고 왕인 신사、백제교、백제역、백제문 그리고 도로 이정표에서도 담로(백제의 외국 주둔지 이름)를 볼 수 있다。오사카에는 <왔소 축제>를 오랜 동안 이어오고 있는데 '왔소'는 왔다는 한국말、백제말이며 축제 내내 일본인들은 “왔어 왔소”를 외친다。이 일본인들의 축제에선 일본인들이 그 뜻도 모르고 일본어에도 없는 '왔소' 등을 외친다。일본 마츠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또 일본인들에 의해 지금도 매년 왕인대전이란 축제로 왕인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왕인은 일본의 4대 군자 중 한 분으로、일본 학문의 신(시조)로 일본인들이 섬기고 있다(일본서기)。일본에 처음 문자를 소개하고 태자(후에 인덕 천황이 됨)의 스승이기도 해서다。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 잠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
<난파진가>
왕인 박사가 지은 <난파진가>로 난바(난파)란 이름도 왕인이 지었다고 전한다。난파진가는 57577조로、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로 인정되는 일본 하이쿠의 원조라 할 수 있다。하이쿠는 557조이다。전해지는 백제의 유일한 노래 <정읍사>는 757조이다。일본이 자랑하고 세계도 인정하는 하이쿠가 어디서 유래됐는지는 확실하다。
대나무 등에 새겨진 <난파진가>가 일본에는 40여 개가 발견됐다。그런데 한국엔? 없다。일본 지식인들은 왕인을 실존했던 인물로 사료와 유적을 들어 인정하고 있는데 반해、한국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어느 나라가 한국이고 어느 나라가 일본인지。。。
오사카를 구경하는 한국인 여행자들 중 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일본 에도시대의 심학자가 쓴 <규오도화>의 두 개구리가 생각난다。많은 것을 보려 킷발을 들었지만 눈은 뒤에 달려 전혀 다른 곳을 보고도 그 다른 것을 사실이고 진실인 줄 알고 있다는 우화가 어찌 일본인만을 위한 깨우침일까。오히려 자기 것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한국인들에게 더 읽혀져야 할 우화이고 글이 아닐까 싶다。
이 우화를 알게 한 책 <절대지식 일본고전>에는 서기 405년 왕인이 처음 문자를 전했다는 사실은 책의 말미에 도표로 알려 줄 뿐이다。지식과 고전을 소개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문자를 전래한 백제의 왕인을 소개하지 않고 있다。애써 숨기려는 것이 역력해 보인다。적어도 번역가는 이에 대해 해설로라도 언급해야 되지 않았을까。
일본 지식인들은 왜 이래야 하는 걸까?
한국 지식인들은 왜 또 저래야 하는 걸까?
한쪽은 스스로 무시하고 알까 두려워 숨기려 들고。。。 지식을 논하는 책에서까지도。
서로 무슨 이익이 될까? 고개가 절로 저어지고 혀를 절로 차게 된다。서로 존중하면 서로 이롭게 할진대 왜 이것이 안 될까。숨기려니 침략 정복하고、부역하니 복속 침탈 당하지 않았는가。날조도 부역도 다 자기모순이며 자기기만이다。과거에만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일진데、지금 역시 여전히 그러하다면? 이쪽이나 저쪽이나、한국이나 일본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