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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조 May 06. 2023

신고'의무'자의 '의무'란

나는 신고'의무'자인데, 그 '의무'가 나를 죄책감으로 누른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등장하던 마리아와 물망초.

천 원짜리 김밥 한 줄 사서 소풍 가는 8살의 이름 없는 아이들.

그런 이름 없는 아이들이 내 삶 어딘가에도 계속 존재하고 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우리 학교에는 ○○원으로 불리던 아이들이 있었다. 한 명이 아니라 꽤 여러 명. 그들을 드세고 억셌으며 늘 사건 사고의 중심에 있었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들과 짝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어디쯤부터, 그들의 이름은 ○○원이었고 그들의 역할은 그 어딘가의 애매한 곳에 있었다. 초등학교에도 존재하는 소위 일진이었지만, 대장질은 못했고 늘 대장 뒤에서 함께 사고 치고(하지만) 혼자 혼나는 그런 어딘가의 위치.


아빠가 빵집을 할 때 당일 판매가 불가해진 빵들은 ○○원으로 갔고 엄마가 미술학원을 할 때 우리 학원엔 늘 ○○원 학생들이 두세 명 공짜로 다녔다. 물론, 우리 집이 힘들어진 이후엔 누구도 도울 수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는 ○○원 아이들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없어진 건 아니었을 테고 아주 잘 숨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성인이 되고, 교사가 되어 보니 나는 아동학대 '신고의무자' 같은 게 되어 있었다. 아동학대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되는 그런 존재. 그리고 아동학대는 항상 존재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언젠가 1학년 아이들을 맡았을 때, 우리 반에는 여름에도 겨울 잠바를 입고 오는 아이가 있었다. 덥지 않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말갛게 웃는 아이의 이는 모두 까맣게 썩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아이는 급식에서 나오는 딱딱하거나 질긴 반찬은 먹지를 못했다.


아이의 손톱은 늘 까맸고 매일 지각을 했고 준비물은커녕 가방을 들고 오지 않는 날들도 잦았다.


소풍 때면 몰래 도시락을 챙겨가, 엄마가 너를 주라고 선생님께 맡겨놨는데 선생님이 잊었다,라는 거짓말을 했다. 아이는 정말로 우리 엄마가 다녀갔냐며 큰 눈을 반짝이며 신나 했다.


늘 허기져 있는 아이에게 아침을 챙겨주며 질문하면 어린아이는 속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주말 동안 엄마가 남자친구와 여행을 가서 오지 않았다, 던가 지금은 형아와 엄마와 셋이 모텔에서 살고 있어요, 라던가 금요일 점심 급식 이후로 월요일 아침까지 밥을 한 끼도 먹지 못했다, 라던가.


여러 번의 전화 끝에 학교에 찾아온 아이의 엄마의 손톱에는 은빛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다. 아이는 양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모든 이가 썩어가고 추워지는 날씨에도 맨발로 학교에 오는데 아이의 엄마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습으로 학교에 왔다.


화가 났다, 아주 많이. 

그래도 나는 일개 교사이고 그녀는 아이의 엄마이니 설득했다.


어머님, 학교에서 하는 치과검진은 무료이니 일단 치과에 다녀오세요. 

지역에서 하는 아동보호센터가 있으니 오후엔 거기에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공부하고 저녁도 먹고 집으로 갑니다.

밤새 핸드폰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학교에서는 주로 잠을 자요. 


-

제가 봉사하느라 치과 갈 시간이 없는데.

거긴 어딘가요? 제가 데려다줄 시간은 없거든요.

그런데 가는 거 우리 애들은 싫어하는데.

안 그래도 핸드폰 요금이 200만 원이 나왔어요.


아이의 엄마는 '하느님의 교회'에 다녔다. 직업을 가지지 않고 봉사를 하고 주말이면 남자친구와 외박을 했다. 


우리는 몇 번의 경고 끝에 신고했다. 

상담사들이 아이와 몇 차례 상담했고, 그들은 나에게 (학교에게) 아이를 ○○원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라는 권유를 했다. 나는 그때 ○○원에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 생각에는, 모텔에서 그렇게 방치되는 것보다는 시설에 가서 제대로 먹고 자고 입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이의 엄마에게 묻자 엄마는 괜찮은 것 같다, 고 대답했다.


문제는 아이였다. 8살 된 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가고 싶지 않다고 울었다. 엄마와 함께이고 싶다고 울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이는 시설로 옮겨졌다. 학교도 가까운 곳으로 전학을 갔다. 전화를 할 수도 방문을 할 수도 없었다. 아이의 적응에 내가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늘 아이에게 미안했다. 죄책감이라는 게 마음에 남았다. 그래도 엄마인데, 엄마와 있는 게 나았을까. 아이의 그 눈이 잊히지 않았다.


○○원은 우리 집 옆에 있다. 나는 오고 갈 때마다 혹시 아이가 있나 늘 곁눈질을 했다. 올해 초, 아이를 만났다. 정말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라는 말에 정말로 눈물이 났다. 아이는 여전히 ○○원에 살고 있었다. 5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엄마는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나는, 그때 신고를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찾아가지 않는 엄마라면, 차라리 그때 신고해서 다행이야.라고 내 죄책감을 지웠다.


지난 월요일에, 아이를 다시 길에서 만났다. 티브이에서 물망초와 마리아를 본 이후였다. 집에 와서 꽤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아이가, 십수 년 전 그 아이들처럼 ○○원으로 불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아이의 이름을 지우고 ○○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가 '의무'를 명목으로 아이의 인생을 흔들 자격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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