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가에 익숙한 직업을 갖고서, 평가가 일상적인 사회에서, 평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교사는 가르치고, 평가한다. 가르침 뒤에는 평가가 따른다. 진단평가, 형성평가, 수행평가, 지필평가, 기초학력평가, 향상도평가..., 이름부터 다양한 평가들이 정기적으로 또한 수시로 이루어진다. 평가를 통해 성취 수준을 판단할 수 있어서 평가는 배우는 학생들에게나 가르치는 교사에게도 가르치고 배워야 할 부분을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평가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모르는 것부터 가르치고 배우면 되는 것이다.
가르침에 있어 평가가 꼭 필요한 것을 알지만 나는 평가를 할 때마다 고뇌에 빠진다. 수행평가를 채점할 때는 이런 생각과 고민을 한다. 이 아이의 표현이나 문장 또는 서술은 왜 20점이 아니고 19점인지, 19점이라는 점수는 과연 타당한지, 20점을 받은 아이가 쓴 내용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 차이가 1점만큼의 격차가 맞는지, 혹여 아주 사소한 차이를 내가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내가 일관성 있는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하며 평가한다. 내가 제대로 된 점수를 준 게 맞는지 한 번의 판단으로는 확신할 수 없기에 네 번, 다섯 번 때로는 그 이상의 횟수로 거듭 채점하고 확인한다. 아이들에게 내가 부여한 점수가 공정하고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평가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평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느껴진다.
평가에 관해 내게 주어진 책임보다 혼자서 괜스레 더 큰 무게의 책임감을 느껴서 힘겨운 것을 모르지 않는다. 알면서도 나는 견디기가 힘들고 고되다. 평가는 교사의 권한이고 해야 하는 일이지만 내가 정한 기준이 맞는지 혹시라도 오류나 실수는 없는지 자꾸만 검열하게 된다. 의심하고 경계해서 보다 완전에 가까운 기준으로 오차 없이 판단하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내가 맞는지 의심하고 확인하는 게 자기부정을 하는 것만 같다.
평가는 교과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평가해야 한다는 사실이 한층 더 부담스럽고 내키지 않는다. 평가의 대상이 어린아이들이라고 해서 그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라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 더욱 어렵고 힘이 든다. 교사들이 흔히 행발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현재의 명칭은 2009 개정 교육과정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의 명칭이 '행동발달사항'이었는데 행발은 이전의 명칭을 줄여 부르던 게 지금까지 편하게 사용되는 것이다-을 작성할 때 내 고뇌는 자괴감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나는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긴 시간 동안에 아주 일부의 시간만을 함께 할 뿐이다. 그런데 그 잠깐의 시간에서 보인 아이들의 눈빛과 표정, 말과 행동, 수준과 성취의 정도를 모두 판단해야 한다. 혹여 내가 이 아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내가 가진 한계가 저 아이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내 경험치로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의 미래를 함부로 가늠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저 아이에게 들이민 기준이 너무 과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의 나는 내가 맞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똑같고 또 많이 다르다. 그때는 맞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을 지금은 틀리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기도 하고, 그때는 내가 모르는지도 몰랐던 세상의 이치들을 지금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지금도 미완(未完)이지만 그때는 완(完)을 거론할 수 없는 그저 미(未)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제 교사라는 이름으로 그런 미(未)의 상태에 있는 아이들을 미완(未完)인 내가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미완(未完)의 내가 앞으로 어떤 완(完)이 될지 모르는 아이들의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꺾거나 짓밟게 되지는 않을까 두렵고 무섭다. 이 아이들은 반드시 나를 넘어설 것이다. 내가 내 부모를 넘어선 게 당연했듯이 지금의 나를 미래의 이 아이들은 넘어서야 한다. 언젠가 나를 넘어설 아이들을 지금의 내가 판단하고 평가한다. 매우 조심스럽고, 아주 신중해야 한다. 내가 설리번-헬렌 켈러의 선생님-은 못 되어도 에디슨의 선생님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학교 밖에서도 나는 평가에 익숙하다. 나를 향한 타인의 평가에 신경을 쓰고 나 또한 타인을 습관적으로 평가한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고 평가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여전히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상에서 가볍게 시시때때로 이루어지는 평가가 때로는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대충 알고 그만큼 잘 모르고 자주 모른 척한다. 살면서 내가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내가 누군가를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으면서도.
그래서 더욱 나를 평가하지 않고 나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긍정하고 가치롭게 여기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또한 그래서 내게도, 나부터 그런 마음의 눈이 있는지 살펴본다.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나를 온전히 수용하는 그 사람을 나는 완전히 납득하기를 희망한다. 내 모든 것을 그가 이해하기를 바라고 나는 그를 모두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꿈꾼다.
나는 평가에 익숙한 직업을 갖고서, 평가가 일상적인 사회에서, 평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고뇌와 번민이 없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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